[문화칼럼]김누리/위대한 지식인의 조건

  • 입력 1999년 10월 15일 18시 45분


“아니 그라스가 아니라 내가?”

27년전 전후 독일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보받고 하인리히 뵐이 터뜨린 제일성이다.

귄터 그라스가 마침내 20세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노벨문학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게다가 그의 대표작 ‘양철북’에 대해서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라는 거창한 찬사까지 붙었다. 그러니 ‘지각수상’의 응어리도 어지간히 풀렸으리라.

그라스는 분명 위대한 작가이다. 그의 작품은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예술적 경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독창성이 ‘대가’의 조건이라면 토마스 만과 프란츠 카프카, 제임스 조이스와 가브리엘 마르케스와 함께 그라스도 대가의 반열에 들어서기에 손색이 없다.

살만 루시디와 존 어빙 같은 세계적 작가들까지 진작부터 그라스의 ‘제자’임을 자처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라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그의 문학 세계를 넘어선 곳에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독일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지식인이다. 그의 ‘참여’는 참으로 거침이 없어서 60년대 이후 독일 현대사의 정치적 굽이마다 그의 자취가 배어있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 그의 신조에 따르면 ‘침묵은 죄악’이다.

그라스는 에르하르트와 키징거 총리의 나치 전력, 언론재벌 슈프링거의 ‘파쇼적 행태’, 68학생운동의 폭력성, 긴급조치법 제정, 소련의 체코 침공을 강도 높게 비판하였고 교육개혁, 노동자 경영참여, 동방정책을 지지하고 관철시켰으며 반핵평화운동, 환경운동, 제삼세계 지원운동의 선두에 서서 싸웠다. 루시디 김지하 황석영 등 정치적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는 작가들에 대한 그의 국제적인 연대활동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이다.

하지만 국내외에 걸친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의 앙가주망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퍽이나 소박하다. “보통시민의 의무를 다한 것일 뿐”이란다. 60년대 초부터 빌리 브란트의 선거운동에 발벗고 나섰던 그였지만 정작 브란트가 정권을 잡자 홀연히 그의 곁을 떠났다.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으니 이제 물러설 때입니다. 저는 장관이나 뭐 그런 것이 되려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저의 직업으로, 다시 작가로, 화가로 돌아가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벌써 원고지를 잔뜩 사놓았습니다.” 그 원고지에서 나온 것이 유명한 문명비판 소설 ‘넙치’이다.

그라스는 줄기찬 참여를 통해 나치에 의해 실추된 독일의 도덕적 위상을 국제적으로 복원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니 그가 ‘독일 정체성(正體性)의 생산공장’이라고 불리는 것도 과장만은 아니다. 망명법 개정이건, 낙태법 개정이건 민감한 정치적 사안이 정파간의 쟁점이 될 때 TV카메라가 찾는 곳은 그라스의 서재이다. 그는 정파의 이해를 넘어 보편적 정의의 이름으로 말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라스는 공공영역의 갈등을 조정하는 하나의 ‘제도’가 된 것이다.

우리에겐 그라스가 없다. 곡절 많은 세파가 우리의 그라스들을 사납게 삼켜버린 탓이리라. 뿐만 아니라 지식인이란 말조차 촌스러움의 징후로 치부되는 세상이다. 활개치는 건 신지식인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무리들뿐. 허나 아직도 희망은 있다. ‘인격화된’ 도덕적 권위는 사라졌지만 ‘제도화된’ 도덕적 권위가 어느샌가 우리 곁에 와있지 않은가.

우리는 장준하와 문익환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PD수첩과 참여연대가 있다.

김누리〈중앙대 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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