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오래된 정원 (213)

  • 입력 1999년 9월 5일 18시 45분


꼼짝도 할 수 없고 누울 수도 엎드릴 수도 없는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처리를 하기 위하여 미세한 동작으로부터 시작해 본다. 이런 동작만이 시간을 벗어나게 해준다. 먼저 두 손이 조금은 놓여나야만 한다. 대개의 전과 경력이 있는 일반수들은 징벌방 안에서 먼저 못이라든가 무슨 철사 나부랭이라든가를 찾아낸다. 없으면 며칠이고 틈을 엿보았다가 소지에게 부탁해서 꼭 손에 넣고야 만다. 아니면 관구사무실이나 조사실에 오가는 사이에 앞수정으로 바꾸게 해달라고 타협안을 내기도 하고 수갑을 잠시라도 풀어 달라고 사정을 한다. 수갑을 고쳐 채울 때가 그 기회인 셈인데 이 순간에 한쪽 팔목을 엇비스듬하게 치켜 올려 공간을 만든다. 그리고는 방에 돌아와 마른 손을 비누에 잔뜩 문지르고 나서 손가락을 주욱 펴고 움츠려서 수갑으로부터 빼낸다. 시찰구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 얼른 자유로웠던 손을 끼우고 얌전히 앉아 있는다.

내가 타협할 여지는 없으므로 마루에 붙어서 기어 다니며 손바닥으로 이리저리 쓸어본다. 구석이나 모퉁이에 판자가 조금이라도 들뜨거나 움직이는 곳이 있으면 그곳을 계속해서 발을 바꿔 가며 눌러댄다. 한 시간쯤 그러고나면 손가락 끝에 못의 대가리가 조금 튀어나온 것을 알게 된다. 뒤로 비스듬히 누운 채로 못을 손톱 끝으로 잡고 힘을 주어 빼내려고 기를 쓴다. 어떤 경우에는 쉽게 뽑히기도 하고 아니면 하루 종일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도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고 마루 판자의 못 하나를 뽑는 일이 역사를 바꾸는 일 보다 더욱 중요한 사업이 되어 버린다. 아, 드디어 못이 뽑혔다! 이 작은 쇠붙이야말로 짐승으로부터 사고하고 일하는 인간으로 나를 바꿔줄 열쇠인 것이다. 봄이 오면 저 시멘트 틈바구니 어딘가에서 기적처럼 싹이 터 올라 자라는 연두색의 작은 떡잎처럼 나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치열한 부지런함이 아니던가.

저녁 때가 되었나보다. 환기구멍으로 비껴 들던 빛이 차츰 옮겨서 벽의 왼쪽으로 가다가 빛은 차츰 짧아져 환기구 부근으로 올라가면서 더욱 가늘게 된 다음에 환기구의 왼쪽 모퉁이에 조금 묻은 얼룩처럼 변했다가 깨끗이 사라진다. 그맘때에 복도 저편에서 구수한 된장 냄새와 더불어 식사를 실은 손수레의 쇠바퀴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아직도 뒷수정은 풀리지 않았다. 아마도 한 사나흘 뒤에 관구실에서 부르기 전까지는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열쇠 소리가 들리고나서 식구통 대신 아예 철문이 활짝 열린다. 담당이 익숙한 손짓으로 문 바로 앞에 밥과 국과 찬의 하얀 플라스틱 그릇이 세 개 얹힌 쟁반을 들여 놓아 준다. 그리고 그는 이죽거린다.

개 밥 처먹어.

단식 중이라면 발길로 그대로 복도를 향하여 차 던지고 겨울 투쟁 중에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굴욕을 참고 먹어야 한다. 뒤로 두 손과 팔을 묶인채로 무릎을 꿇고 쟁반 위로 상반신을 숙여서 입으로 더듬어 밥알을 밥 그릇에서 떼어낸다. 코와 턱에 음식이 붙어 올라온다. 그러나 몇번 먹고나서 요령이 생기면 밥을 한쪽 모퉁이에서부터 혀를 찍어 몰아 주면서 이빨로 집어 올린다. 그 다음에 봉긋이 솟은 다른 모퉁이의 밥을 물어 낸다. 국은 이빨로 그릇을 물고 지긋이 힘을 준 다음에 고개를 약간 위로 올려 세심하게 내용물의 높이를 가늠하면서 이 사이로 흘려 넣으면서 빤다.

<글: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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