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 스탠더드]사생활보호 '法 울타리' 높아진다

  • 입력 1999년 8월 12일 19시 27분


탤런트 A양의 비디오는 올 초 불법 복제 시장에서 폭발적 수요를 창출했다. 사생활 중 사생활인 성관계가 공개됨으로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A양은 눈물을 흘리며 팬들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문제의 비디오 테이프를 유출해 인터넷에 올린 사람과 남의 은밀한 사생활을 거리낌없이 지켜본 사람들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생활 침해라고 할 수 있다.

요즘 한국 TV에서는 출연자의 모교를 찾아가 당시 성적표를 공개하는 프로그램을 인기리에 방영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런 행위가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올랜드 매직 소속 유명 농구선수인 마일스 사이먼이 애리조나대와 캔자스시티스타지가 자신의 동의없이 대학 시절 성적을 공개했다며 제기한 소송이 진행중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행위가 명예훼손의 일부로 다뤄지고 있지만 외국에서는 명예훼손보다는 사생활 침해로 규정돼 엄청난 손해배상을 감수해야 한다.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해는 언뜻 비슷한 개념같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명예훼손은 대부분이 허위사실을 적시해 유포하는 행위임에 비해 사생활 침해는 본인의 의사에 반해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사생활 침해의 범위는 까다롭게 규정되지만 한번 걸리면 피고인이 파산해버릴 정도로 손해배상액이 크다.

남편이자 가수인 토미 리와의 정사를 담은 비디오가 인터넷을 통해 공개됐던 미국의 여배우 파밀라 앤더슨은 사생활 보호를 받지 못했다.

문제의 비디오를 찍은 장소가 기차나 배 등 사생활을 보호받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며 그가 언젠가 TV 토크쇼에 나와 이 비디오를 찍었다는 말을 한적이 있다는 이유로 올 4월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미국 아칸소주에 사는 넬리 여사(당시 96세)는 신문가판대를 운영하며 어렵게 살았다. 95년 어느날 무심코 자신이 팔던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펼쳐든 그는 기절할 뻔했다. ‘세계 최고령 신문배달부가 임신으로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기사와 함께 자신의 사진이 1면에 실려 있었다. 이 신문배달부에게 임신을 시킨 사람은 은둔한 백만장자라는 식의 완전한 날조기사였다.

넬리 여사는 자신과 전혀 무관한 기사에 사진을 실은 것은 사생활 침해이며 이로 인해 엄청난 감정적 고통을 겪었다며 신문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150만달러의 손해배상금을 받아냈다.

이 기사를 실었던 신문사의 편집자는 나중에 이 사건이 ‘실수’였다고 인정하고 “왜 그의 사진을 실었느냐”는 질문에 대해 “그 할머니가 죽은 것으로 알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에 대한 사생활 침해는 인정되지 않는 것일까.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생전 주치의에게 자신이 암환자인 것을 비밀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테랑대통령의 주치의였던 클로드 구블레는 96년 1월 미테랑대통령이 사망하자 그가 자신의 질병을 숨기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는 내용을 담은 ‘대비밀’이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같은 폭로행위가 미테랑대통령의 사생활을 침해한 것이라며 이 책의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을 받아들였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사생활 침해의 범위는 점차 넓어지는 추세. ‘알 권리’가 개인의 ‘인격권’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이 최근 판결의 국제적 흐름이다.

95년 미국 데이트라인NBC 취재진은 트럭회사의 비리를 밝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이 프로가 트럭운전사들에게 호의적으로 제작될 것이라고 속여 트럭운전사들을 인터뷰했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은 ‘고속도로는 트럭운전사의 킬링필드다’라는 내용으로 방영됐다. 문제의 트럭회사와 트럭운전사는 보도내용이 사실이기 때문에 명예훼손을 문제삼을 수는 없었지만 취재과정에서 사생활을 침해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해 트럭회사는 35만달러, 트럭운전사는 17만5000달러의 손해배상액을 받아냈다.

이같은 사례는 한국에서도 발생했다. 한 방송사가 ‘대학 신입생들의 환영회가 호화판’이라는 내용을 취재 보도하면서 이 대학생들에게는 환영회가 긍정적으로 보도될 것이라고 말해 촬영허가를 얻어냈다.

취재를 위해 위장취업을 하거나 몰래카메라를 들이대고 녹음을 하는 행위,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이 아닌 다른 사실을 기사화하는 것은 모두 사생활 침해에 해당한다. 이런 사례들은 앞으로 취재결과는 물론 취재과정에서도 도덕성을 갖춰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서는 98년 대법원이 유방성형수술 관련 보도에 대해 ‘자신의 사생활의 비밀에 관한 사항을 함부로 타인에게 공개당하지 않을 법적 이익을 가진다’고 판시했다.

유방성형수술의 위험성과 부작용을 고발하는 선의의 보도라고 하더라도 유방성형수술을 한 당사자의 신원을 공개한 것은 잘못이라는 판결이었다.

법무법인 태평양 오양호(吳亮鎬)변호사는 “프라이버시권을 강조하다보면 국민의 알 권리가 손상되기 때문에 양자의 균형점을 잘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 프라이버시권은 엄격하고 예측가능하게 적용하되 침해가 드러나면 확실한 불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성희기자〉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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