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법과 원칙이 무너져서는

동아일보 입력 1999-08-08 18:26수정 2009-09-23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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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지금 법과 원칙이 흔들리는 심각한 아노미 현상에 빠져있는 듯하다.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의 가치나 도덕 기준을 잃은 혼돈상태에서는 어느 사회도 건강할 수 없고 어느 국가도 바로 설 수 없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구속중인 서이석(徐利錫)전경기은행장은 6일 경기은행 대출비리사건 4차 공판에서 “지난해 3월 국민회의 서정화(徐廷華)의원으로부터 부실기업인 ㈜일신에 100억원을 대출해주라는 압력을 받고 50억원을 대출해줬다”고 진술했다. 서의원측이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당장 누구의 말이 맞는지 예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검찰은 경기은행 퇴출 저지 로비사건 수사대상에서 서의원은 애초부터 빼놓았었다. 검찰의 말로는 서의원이 서전행장에게 대출청탁은 했으나 대출받은 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아 수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또한 사실여부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간 우리 사회의 관행이나 일반의 상식으로 볼 때 검찰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기은행사건은 임창열(林昌烈)경기지사 부부와 최기선(崔箕善)인천시장간의 형평성 잃은 법적용의 문제에서부터 ‘이영우(李映雨)미스터리’ 등 숱한 의문점들이 서둘러 봉합된 듯한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은 서전행장의 새로운 진술이 나온 만큼 더이상 어물어물 덮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지 말고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명확히 밝혀야 할 것이다. 며칠 전 박순용(朴舜用)검찰총장은 ‘원칙과 기본이 바로 선 검찰’로 거듭나겠다고 천명했다. 이제 검찰은 그와 같은 복무지침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행동없는 말만으로는 검찰이 바로 설 수도,국민의 신뢰를 얻기도 어렵다.

법과 원칙을 바로 세우는 것은 비단 검찰의 일만은 아니다. 우리 정치가 당면하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다. 모든 개혁의 전제가 되어야 할 정치개혁의 요체는 단순히 돈 적게 들고 효율성 높은 제도를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그에 앞서 정치가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러려면 뇌물=유죄, 정치자금과 떡값=무죄라는 식의 원칙도 기준도 없는 법적용의 잣대부터 없어져야 한다. 또한 권력형 비리사범도 때만 되면 줄줄이 풀어주는 대통령 사면권 남용은 억제돼야 한다. 지금 여론은 권력형 비리와 부정부패 사범의 8·15특별사면을 놓고 들끓고 있다.

지금 정치권, 특히 집권 여당은 내년 총선에 대비해 몸집 불리기에만 급급한 모습이다. 어떤 명확한 원칙이나 기준도 없어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개혁을 외치고 부패척결을 강조한들 돌아오는 것은 국민의 냉소와 불신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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