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렘브란트는 왜 자화상을 75점이나 그렸을까

  • 입력 1999년 7월 22일 18시 12분


평생에 걸쳐 그린 작품들 중에서 자화상의 비중이 렘브란트만큼 큰 화가는 없다. 렘브란트의 자화상들은 그가 화가로서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1669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늙어가는 화가의 모습을 연대기처럼 펼쳐주고 있다. 어째서 그는 그렇게 자주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을까.

런던 국립 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렘브란트가 그린 렘브란트’에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약 75점 중 일부가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그가 자화상을 그렇게 자주 그린 이유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또 다른 질문들이 떠오른다. 그림 속의 그는 왜 이국적인 옷으로 성장을 했을까. 자기 작품의 잠재적인 구매자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려던 것이었을까. 그는 모델료도 들지 않고 언제라도 이용할 수 있는 자신을 상대로 새로운 테크닉을 시험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자화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말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일까. 그가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렘브란트가 그린 렘브란트’ 전시회에는 렘브란트의 그림과 동판화 60점 및 그의 제자 7명이 그린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전시회는 9월5일까지 국립 화랑에서 계속된 뒤 네덜란드의 헤이그로 자리를 옮겨 모리트슈이스 화랑에서 9월25일부터 내년 1월9일까지 열린다. 국립 화랑의 닐 맥그리거 사장과 모리트슈이스 화랑의 프레데릭 뒤파르크 사장은 이 전시회의 화집에 실린 공동 서문에서 전시회의 목적이 자화상에 나타난 렘브란트의 ‘의미와 목적’에 새로운 빛을 던지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대한 해석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것은 렘브란트가 ‘그림 속에 자서전을’ 쓰고 있었으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 꾸준히 자신에 관한 지식을 얻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 가설은 프로이트가 등장한 이후 제법 많은 지지자를 확보했지만 현재 남아 있는 증거들을 종합해보면 렘브란트는 보다 평범한 이유 때문에 자화상을 그렸던 것 같다. 즉 그가 36세 때인 1642년 아내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자신을 편안한 모델로 이용해서 빛과 얼굴 표정을 공부했던 것이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그는 한동안 자화상을 그리지 않다가 1652년부터 다시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의 그림들은 점점 주름살이 늘어가는 얼굴과 그의 존재가 내뿜는 힘으로 인해 전혀 실험을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이제 화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는 자신의 모습을 화려하게 꾸미는 대신 어두운 색의 작업복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자신의 얼굴만은 항상 시선의 중심에 배치했다. 아마도 그는 죽음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생각했던 것 같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렘브란트 연구소의 에른스트 반 드 베테링은 “렘브란트가 자기 분석의 한 형태로 자화상을 그렸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면서 렘브란트의 시대에 화가들은 자화상을 이용해서 테크닉을 시험하고 자신의 명성을 끌어올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렘브란트가 루벤스나 반 다이크 등 같은시대 화가들보다 더 자주 자화상에 이끌렸던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1606년에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태어난 렘브란트는 20대 초반부터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갖가지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소형 동판화들을 보면 그가 골상학과 표정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림으로 된 자화상의 얼굴에는 거의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다.

그는 어떤 인물, 예컨대 병사나 동방의 군주 같은 인물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묘사하는 초상화의 일종인 ‘트로니’의 모델로 자신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1631년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후에 그린 트로니 작품들은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가 말년에그린자화상들에서는상업적인 화가의 이미지보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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