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속의 심리학]「플레전트 빌」의 컬러

  • 입력 1999년 6월 6일 18시 15분


한 남자가 시뻘겋고 퉁퉁 부은 손을 하고 상담실에 들어섰다. 손이 그 지경이 된 이유는 하루에도 몇십번씩 손을 씻기 때문. ‘강박증’이라 불리는 반복행동을 되풀이하는 이 환자는 잉크 반점을 이용한 검사 결과 색채가 들어 있는 반점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환자의 경우는 ‘생각’은 무척 많지만 이 생각에 따른 ‘정서’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강박행동 밑에 깔린 강박사고, 대인관계의 두려움이나 자신을 ‘왕따’시켰던 친구에 대한 미움 등에 지나치게 몰두한다. 그러다보니 이와 연관된 분노와 불안 등의 정서를 수용하는 대신 오히려 이 정서를 손을 씻는다는 외면적 행위로 희석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에게 색깔이란 정서를 의미한다. 일례로 우리는 빨간색에서 정열과 광기, 분노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노란색에서는 희망과 따뜻함을 연상한다. 물론 ‘해피 투게더’같은 영화에서 노란색은 상처받은 주인공의 마음을 대변했지만.

색채와 정서의 연관을 잘 보여준 영화로 게리 로스 감독의 ‘플레전트 빌’이상 가는 게 없을 것같다. 불도 나지 않고, 청소년들이 어떤 말썽도 부리지 않는 50년대의 흑백 TV시트콤 ‘플레전트 빌’에 빨려 들어간 90년대의 두 청소년들은 흑과 백 만으로 채워진 마을에 사랑의 달콤함과 이별의 슬픔을 전해준다.

이들의 영향으로 자신의 정서와 욕망을 느끼게 된 흑백주민들은 그때마다 색깔을 얻게 되는데, 사람과 사물이 차츰 화려한 컬러로 변화하는 과정은 정말 매력적인 영화의 볼거리다. 특히 자신이 컬러 인간임을 들킬까봐 살구빛 피부에 회색 파우더를 바르던 여배우 조앤 알렌은 자신의 진정한 정서를 외적 행동으로 덧칠해버리는 위의 강박증 환자와 다를 바가 없는 셈.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색깔있는 현실이단조롭고무미건조한이상향보다 훨씬 낫다는 주제의 이 영화는 심리적으로는 흑백인간이나다름없는사람들에게귀기울일만한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다.

심영섭(영화평론가·임상심리학자)kss1966@unitel.co.kr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