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파이어니어14]삼성전자 황창규 부사장

  • 입력 1999년 4월 27일 19시 05분


94년 어느날 저녁 이건희(李健熙)삼성회장의 영빈관인 승지원에 삼성전자 사장단이 모였다. 사장단 회의에 앞서 삼성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2백56메가D램의 성과를 설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경사스러운 날이었지만 분위기는 무거웠다. 경쟁사의 기술을 몰래 빼냈다는 냉장고 스파이사건이 터져 연일 시끄러웠던 때였다. 참석자들은 모두 불호령이 떨어질 것으로 보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2백56메가D램 개발의 주역인 황창규(黃昌圭·당시 이사)부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브리핑이 시작됐지만 5분이 지나도록 이회장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말을 돌렸다.

“미국에는2억명이넘는사람이 살고 있습니다.(다들‘갑자기이게 왠 소린가’하는 표정). 뛰어난 사람도 많지만 못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역시 미국은 세계 최강국입니다. 제가 만든 2백56메가D램은 2억5천6백만개의 트랜지스터로 이뤄졌습니다. 그 가운데 단 하나라도 디펙트(결점)가 있으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개발자만 할 수 있는,자신감 넘치는 단순명쾌한 설명이었다. 이회장의 표정에도 비로소 미소가 감돌았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5시간 이상 걸릴 예정이었던 사장단 회의는 2시간만에 끝났다.반도체는 운명황부사장이 반도체를 처음 구경한 것은 서울대 전기공학과 3학년이던 74년. 그는 한눈에 반도체에 반해버렸고 평생을 반도체 연구에 매달리게 된다.

“손톱만한 칩속에 전자 물리 화학 등 이공계 학문의 모든 분야가 다 들어있더군요. 마치 양파 껍질을 벗기는 듯한 재미가 있었지요.”

대학원 전공으로 반도체를 선택했다. 반도체 기술이 국내에 소개된지 얼마 안돼 지도교수조차 없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뜻이 맞는 대학원생끼리 스터디그룹을 만들었다. 당시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삼성전자 반도체 연구의 다른 축인 진대제(陳大濟)부사장.

연구를 위해 81년 미국으로 떠났다. 메사추세츠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명문 스탠퍼드대에서 4년6개월간 연구교수 생활을 했다. 2년동안은 미국 인텔의 자문 역할도 겸했다. 바쁜 시절이었지만 이론과 실무를 함께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대학 교수로, 세계 최대의 반도체 회사인 인텔의 자문으로 한창 잘나가던 그가 한국행을 결심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89년초 일본의 6개 반도체업체 초청으로 열흘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마지막날 만난 히타치 연구소장이 황부사장에게 “삼성 반도체가 비록 제품을 만들고 있지만 일본을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고 지적했다. 당시 한국의 반도체 기술은 일본보다 1∼2년 정도 뒤져 있었다. 옳은 지적이었지만 은근히 오기가 치밀었다.

미국 생활도 어느덧 10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 출장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안에서 귀국을 결심했다.빛나는 성과한국이 세계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생산국으로 올라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미국 일본에 이어 뒤늦게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한국은 16메가개발을 일본과 같은 시기에, 64메가D램을 세계 최초로 발표하면서 선두로 올라섰다. 94년 2백56메가D램 개발은 일본의 추격에 쐐기를 박는 결정타.

그에게 ‘2백56메가D램 개발’이라는 중책이주어진것은삼성전자 입사 2년째인 91년말경. 정예멤버로 팀을 꾸려 2년이 넘는 기간을 휴일도 반납한채 연구에 몰두했다. 94년 8월 결실이 얻어졌다.

“단 하나의 결점도 없이 완벽히 작동하는 2백56메가D램 칩을 만들어냈을 때의 감동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연구개발 결과를 발표하자 일본 언론에서 ‘믿을 수 없다’는 식의 언론보도가 연일 나왔다. 여전히 한국의 기술력을 한 수 아래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

“안되겠다 싶어 그해 12월에 미국 휼렛패커드사에 2백56메가D램의 샘플 제품을 전달했지요. 그제서야 일본이 패배를 수긍하더군요.”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력제품은 64메가D램. ‘21세기 반도체’로 불리는 2백56메가D램은 94년 개발됐지만 아직 시장조차 본격적으로 형성되지 않았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선 그만큼 연구가 시장을 앞서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연구는 한국이 주도하고 있다.

황부사장은 “삼성전자는 내년쯤 세계 최초로 4기가D램을 발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가오는 21세기에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결코 빼앗기지 않겠다는 각오다.

▼ 프로필 ▼

△53년 부산 출생. 올해 46세. 나이보다 10년은 젊어보인다.

△부산고 졸업(72년)후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박사학위(85년).

△89년 삼성전자 입사. 94년 상무, 98년 전무에 이어 1년만에 부사장으로 초고속 승진.

△후덕해 보인다는 지적에 “반도체학회인 VLSI회의 심사위원 시절 일본측 논문이 발표될 때마다 조목조목 반박해 박살냈다”고 말한다.

△체구는 그리 크지 않지만 만능 스포츠맨. 30년간 테니스를 쳤고 별로 져본 기억이 없다고. 골프는 80대 중반.

〈홍석민기자〉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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