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전주성/기어가는 지하철속의 분노

  • 입력 1999년 4월 21일 19시 24분


한국에서는 갈등이 생기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문제는 이러한 골목길 정서가 정치건 경제건 나라 살림 곳곳에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경제위기로 벼랑끝에 몰렸다가 이제 겨우 정신 추스를만 하니 정파간 노사간 밥그릇 싸움에 가속이 붙고 있다. 하는 짓은 속보이는 제몫 챙기기인데도 겉으로 말들은 번지르르하게 한다.

▼ 납득못할 노조 파업 ▼

싸우는 자들은 제 얘기좀 들어보라 핏대를 세우지만 싸움할 기력조차 없는 서민이나 실업자들는 기어가는 지하철 속에서 좌절과 분노를 느낄 뿐이다. 잘산다는 것은 내가 차지하는 몫이 커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경제가 성장해야 하고 과실의 분배가 공평해야 한다. 고도성장 경제에서는 분배가 다소 악화돼도 내 몫의 절대 크기가 커질 수 있으므로 형평과 관련된 사회갈등이 작을 수 있다. 독재를 한 박정희가 향수로 남아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요즘과 같이 성장이 위축돼 있는 경우에는 분배와 관련된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마이너스 성장의 과실, 즉 고통이 고르게 분담된다 해도 싸움이 날터인데 나만 손해를 더 보는 것이 아니냐고 느끼는 계층이 많다면 경제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사회 각 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구조조정이 경제 재도약의 기틀이 되고 이에 따르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10% 성장에 익숙해 있다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곤두박질쳐서 그런지 모두들 성장률 회복에만 정신이 팔려 지난 일년을 보낸 것 같아 안타깝다. 좁게는 구조조정의 고통분담, 넓게는 분배와 관련된 계층간의 갈등은 예견된 것이었다. 무슨 외국전문가가 한마디 했다 하면 꺼벅 죽으면서 힘없는 다수의 목소리는 외면하기 일쑤였다. 목소리가 작으면 손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작은 목소리들이 살아남는 방식으로 이익집단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있는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 최대의 성장을 이루는 것은 전문가의 몫이다. 반면에 성장의 과실이나 위기의 고통을 나누는 분배정의의 원칙은 국민정서를 바탕으로 결정돼야 한다.

민주사회에서는 노조건 정부건 야당이건 국민이 공감하는 세력이 힘을 받는다. 지하철파업을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시민과 전쟁을 선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노조는 전략을 위해 대의를 저버리는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조건없이 파업을 중단하고 시민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정당한 경로를 통해 국민정서에 호소해 국민이 정부에 압박을 가하게 해야 한다. 그동안 노동자 계층의 억울한 사정에 공감했던 사람들마저 등을 돌리게 해서는 안된다.

▼ 시민 곁으로 돌아가야 ▼

타협만 있고 원칙이 없는 노사정위원회가 왜 무용지물인지, 실업대책없는 구조조정이 왜 효과적이지 않은지, 고용창출이 실업대책이라는 전문가들의 탁상공론이 왜 사람을 맥빠지게 하는지를 주장과 감정보다는 원칙과 논리로써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의 공복인 정부는 사회갈등의 폭이 커져갈수록 주인 곁은 굳게 지켜야 한다.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민주정부가 국민을 제물로 삼는 이기주의에 원칙대로 대응하는 것을 누가 비난하겠는가. 정부가 갈등의 중재자 역할을 못하고 이익집단의 힘겨루기에 끌려가고 나아가 또 하나의 이익집단으로서 국민의 눈에 비춰진다면 어떻게 될까. 알량한 성장률 몇 %는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고 우리 경제 구석구석에 고여 있는 비효율의 늪은 더욱 썩어갈 것이다.

목소리 작은 사람은 무시하고 목소리 큰 사람과는 타협하는 정략적인 노사정책이 설 땅은 없다. 진정으로 강한 정부라면 소리없는 다수의 편에 설 수 있어야 하고 능력있는 정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고통분담의 원칙을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살기 위해 목소리를 모았던 노조원들이 혼자서도 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노조나 정부 양측 모두 국민의 등을 밟고 올라서는 힘겨루기를 중단하고 서로 국민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현명한 대안찾기에 나서야 할 것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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