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유료양로원 「실버타운의 삶」

  • 입력 1999년 2월 2일 19시 28분


구효기(具孝基·68)할머니의 하루는 활기에 넘친다.

지난해 10월 이른바 ‘실버 타운’인 서울 시니어스 타워에 남편과 함께 입주하면서부터 단조로웠던 생활이 바뀌었다.

아침엔 6시부터 타워 2층 강당에서 단전호흡을 배우고 아침식사 후에는 서예교실에서 글씨를 쓴다. 서예가 끝나면 14층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점심을 먹고나서는 다시 고전무용이나 포크댄스를 배운다. 저녁엔 3층 노래방이나 영화감상실에 간다.

이 모든 여가활동은 무료로 이뤄진다. 입주하면서 낸 입주보증금과 매월 내는 생활비 속에 비용이 다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구할머니의 서울 시니어스 타워는 유료 노인복지시설이다. 숙식은 물론 의료와 문화활동까지 모두 사용자 부담으로 제공된다. 서구에선 이미 보편화됐지만 국내에서는 최근 본격 도입되고 있는 새로운 차원의 노인 공간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실버타운 유료 양로원 요양원 등의 명칭으로 운영되는 유료복지시설은 전국적으로 18곳에 달한다. 대기업들이 건설 중인 것들도 많아 그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유료 노인복지시설에서는 기존 양로원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어렵다.

서울 시니어스 타워(서울 중구 신당3동)에 들어서면 노인들을 위한 갖가지 편의시설과 세심한 배려에 놀란다. 방 거실 화장실의 천장마다 ‘건강이변 감지센서’가 설치돼 있다. 화장실에 들어온 할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질 경우 센서가 위급상황을 자동으로 읽고 간호사실로 연결된 벨을 울리게 돼 있다. 누구든 센서 아래서 15분간 이상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면 어김 없이 벨이 울린다.

노인들이 쓰러진 상태에서도 벨을 누를 수 있도록 벽과 바닥에도 호출 버튼이 설치돼 있다. 입주자 20명당 1명꼴로 간호사가 상주하고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1만원 이하의 진료는 무료다.

물론 유료 복지시설의 입주비는 서민들에겐 부담이 될만한 액수다.

시니어스 타워의 경우 15평형의 입주보증금은 1억3천6백만원이다. 여기에 에 1인당 매달 33만원을 생활비로 내야한다. 생활비에는 식비 관리비 의료비 취미생활비 등이 다 포함돼 있다. 입주보증금 중 66%는 퇴거시나 입주자 사망시 돌려받고 나머지는 거주년수에 따라 15년 균등분할 상각한 잔액만을 받는다.

생활비까지 합쳐 이를 하숙비 개념으로 환산해 보면 독신으로 15평형에 15년간 거주할 경우, 연 금리를 10%로 잡았을 때 최소한 월 1백33만8천원짜리 하숙을 하는 셈이 된다. 부부가 23평형에 살면 1인당 월 1백만원짜리 하숙에 해당된다.

유료 노인복지시설은 매일 잠자리와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무의탁 노인들이 숱한 우리의 현실에서 어쩌면 아직은 꿈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잘해야 중상류층 이상의 노인들에게나 가능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도 이미 ‘쾌적한 노후’를 기대하고 스스로 그런 생활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젊어서부터 저축하고 대비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30, 40대 중 늙어서 자식과 함께 살겠다는 사람이 평균 16∼20%에 지나지 않는다는 여러 조사결과는 이를 반증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나 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기존의 양로시설은 저소득층 노인들을 보호하기에도 벅차다. 질적인 면에서도 쾌적한 노년에 대한 기대를 채워주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 공백을 민간기업이나 사회복지법인들이 채워주는 것은 전반적인 추세다. 미국에서는 첨단 물리치료시설이 갖춰진 유료양로원이 1천8백개에 달하고 이중 80%가 민간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일본에선 70년대에 대기업 생명보험회사 등이 실버사업에 대거 참여해 2백50여개의 실버타운이 대도시 근교에 자리잡고 있다.

만만치 않은 입주금 부담에도 불구하고 시니어스 타워에는 이미 1백가구 1백20명이 입주해 정원 1백44가구를 거의 채워가고 있다. 입주자 중 70명이 독신이고 여자가 60%다. 연령은 60세에서 92세까지로 평균 72세가량. 변호사 회계사 교수 등 전문직 출신이 많고 사업가는 별로 없는게 특색이다.

88년에 종합복지시스템을 갖춘 유료 복지시설의 효시로 문을 연 경기 수원시 유당마을도 정원 85명이 거의 차 있다. 입주자들의 80%가 서울에서 왔고 교직이나 공직에서 은퇴한 중산층 출신이다. 입주자들은 “외국의 실버타운에 살다가 온 사람들도 있다”고 말하고 “시설이 외국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귀띔했다.

강원도 양양 보리수마을은 1백21가구, 1백59명의 노인들이 입주해 있다. 이들 역시 중산층 출신이 대부분이다. 입주자들은 “서울에서 좀 떨어져 있긴 하지만 공기가 맑아 오히려 좋다”고 말했다.

유료 복지시설에 대한 관심은 쾌적한 노년에 대한 모두의 기대가 갈수록 커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어쩌면 노인의 꿈과 변화하는 가족상과의 타협의 산물일 수도 있다. 유료복지시설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의 말이다.

“반드시 자식이 부모를 모셔야만 효도를 하는건 아니잖아요. 이젠 양로원의 개념도 바뀌어야 해요. 다양한 계층의 욕구와 경제수준에 맞는 다양한 노인복지시설이 확충되면 부모와 자식, 그리고 국가에게 모두 좋은 일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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