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26]고급공무원 채용

  • 입력 1998년 8월 18일 19시 41분


‘국세청 9급(한국의 5급 상당)공무원을 뽑습니다’.

올 봄 미국 국세청(IRS)이 전산직원을 뽑는 공고를 냈다. 9, 11, 12급(미국은 18급이 최고직)의 연봉과 함께 응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조건들이 나열되어 있다.

‘소프트웨어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어야 하며 이와 관련한 대학성적과 실무경력 제출하기 바람. 교육 프리젠테이션 팀작업 협상 고객설득 등 대인관계를 원만히 할 수 있어야 함’.

미국시민권이 있고 이 조건을 충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다. 국세청은 응모자를 상대로 몇 차례 인터뷰를 갖고 업무능력을 테스트한다. 필기시험은 없다. 적격자는 3∼5년간 계약을 맺고 일을 맡게되며 업무성적이 나쁘면 계약갱신을 못하고 물러나야한다. 다른 행정부처도 계약직 공무원을 채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미국의 경우 자리마다 철저한 직무분석이 되어있습니다. 자리가 비면 어떤 사람이 필요한지를 확인해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을 바로 채용합니다. 외국 공무원 채용제도의 핵심은 계약제를 통해 전문성을 살리고 경쟁을 유도하는데 있습니다.”(박재완·朴宰完 성균관대 교수)

한국은 다르다. 국세청 5급 사무관의 상당수는 수년간 독서실에서 밤을 밝혀 법조문을 외어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인사를 할 때 희망과 능력이 감안된다고 해도 가장 적합한 사람이 본인의 뜻에 따라 어떤 자리에 앉게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일종의 암기력테스트인 고시를 통해 공무원을 채용하다보니 전문성이 확보되지 않습니다.”(김판석·金判錫 연세대교수)

“고시는 암기 위주여서 고급공무원으로서 필요한 종합분석능력 문제해결능력 리더쉽 등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직무별로 수행능력을 측정할 수 있어야 하는 고시과목도 일반 과목들뿐입니다.”(하태권·河泰權 서울산업대 행정학과 교수)

“고시출신이 기수(期數)를 중시하는 풍토도 공무원조직의 관료주의와 비전문성을 부채질하는 하나의 원인입니다. 공직사회가 다른 부문 개혁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서둘러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한국개발연구원 황성현·黃性鉉 연구위원)

1948년 정부수립 다음해인 49년 8월 국가공무원법이 제정돼 고급공무원을 충원하기 위해 고시제도는 시작됐다. 67∼97년 사법 행정부의 고시출신자 수는 △사법 5천9백96명 △법무관 4백60명 △행정 3천7백90명 △외무 6백91명 △기술 1천18명 등 모두 1만1천9백55명. 공무원 전체에서 고시출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낮다. 그만큼 고시는 ‘좁은 문’이다. 요즘 새로 임명받는 5급 공무원중 70%는 6급에서 승진한 공무원, 10%는 특별채용자이며 나머지 20%가 고시출신이다.

고시출신은 현재도 한국사회를 이끌고 있는 엘리트 집단이며 지금까지 한국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는 누구도 큰 이견을 달지 않는다. 고시제도는 경제개발시기에 일사분란하게 정책을 이끌 인재를 정실(情實)인사가 아닌 방식으로 뽑기 위해 꼭 필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글로벌 경쟁시대에는 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

올 3월 홍콩의 한 컨설턴트사가 아시아지역에 진출한 서방기업인 3백명을 대상으로 행정서비스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아시아 12개국중 11위였다. 가장 큰 원인은 한국의 관료주의였다. 그리고 그 관료주의를 떠받치는 강력한 기둥은 바로 고시제도였던 것.

한국과 달리 싱가포르 정부엔 전문행정관료들로 채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기업에서 개발돼 정부부문에 전파되는 전사적 품질관리시스템(total quality management)을 싱가포르에선 정부관료들이 만들어 민간부문에 전파할 정도.

고시출신 공무원들도 “이젠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개발경제시대에 고시제도가 우수한 인력들을 공직에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이 정도까지 발전시킨 것을 무시할 수는 없겠죠. 그러나 고시제도가 더이상 신분상승의 도구로 쓰여선 안됩니다. 이제는 전문인들이 자유롭게 들어가고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시제도에서 비롯된 공무원의 계급문화도 서둘러 청산해야 할 과제이지요.”(기획예산위 관계자)

올해초 인사위원회 제도 도입을 통해 공무원 임용과 인사의 변화를 꾀하려고 했지만 끝내 무산됐다. 한국사회 기득권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는 공무원조직을 건드린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새로운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획예산위원회는 정부개혁실에 민간계약직 13명을 채용하면서 국내에는 생소한 ‘시장성테스트’를 도입했다. 영국이 91년 행정개혁을 단행하면서 도입한 공무원 채용방식을 따온 것. 예를 들어 행정부의 법무담당관실 공무원을 뽑을 때 기존 법무담당관실 공무원과 민간부문에서 똑같은 법률검토 업무를 하는 법률회사(로펌)로부터 동시에 제안서를 받는다.

제안서에는 ‘얼마의 비용과 인원으로 어떤 일을 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행정부처는 이 제안서를 검토해 더 적은 비용과 효율이 높은 쪽과 계약을 맺게된다.

‘영국 행정개혁의 어머니’로 불리는 다이애나 골즈워디가 4월 방한해 자랑한 것도 바로 이런 시스템을 이야기한 것. “영국 행정서비스의 70%는 공개경쟁을 통해 업무를 따낸 민간인에 의해 제공됩니다.”

〈박현진기자〉 witnes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