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복거일/맘껏 즐길 수 있는 월드컵

  • 입력 1998년 6월 11일 19시 54분


프랑스 월드컵 대회가 마침내 시작됐다.

워낙 큰 행사라 대중매체들은 오래전부터 이 ‘지구촌 축제’를 다루어왔다. 그렇다. 자주 쓰여서 이젠 낡은 표현이 됐지만 ‘지구촌 축제’란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표현이다. 월드컵은 ‘지구 제국’이 나타나면서 비로소 가능했고 다른 편으로는 ‘지구 제국’이 자리잡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철도와 기선이 보급되기 전에는 월드컵과 같은 국제 경기들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리고 라디오의 보급으로 세계의 대중이 실시간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된 뒤에야 그런 경기들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축제가 될 수 있었다. 내용은 그만두고라도 결과를 여러달 지나서야 알 수 있는 운동 경기에 누가 관심을 가지겠는가. 그래서 국제 경기들은 세계가 하나의 유기체가 된 뒤에야 나왔다.

근대 올림픽이 1896년에 처음 열렸다는 사실과 라디오가 보급된 1920년대에야 비로소 그것이 백인들만의 잔치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은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월드컵과 같은 국제 경기들이 그저 ‘지구 제국’의 출현이 불러온 또 하나의 현상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지구 제국’이 자리잡는 일을 돕기도 한다.

운동 경기는 또렷하고 공정한 규칙들을 가졌다. 우리가 운동 경기에서 그리도 큰 즐거움을 얻는 것은 바로 그 사실 덕분이다. 규칙이 또렷하지 않고 공정하지도 못한 현실의 각박한 경기들에선 운동 경기들에서 맛보는 깨끗한 즐거움을 맛보기 어렵다. 지금 세계는 무척 불공평하다. 특히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그러하니 세계 무대에서 중요한 배역들은 대부분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모든 나라 사람들이 공평한 조건 아래에서 기량을 겨루는 월드컵과 같은 경기들은 그래서 세계를 조화로운 공동체로 만들고 모든 사람들이 ‘지구 제국’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한다.

이런 사정은 우리가 4년 뒤 우리나라에서 열릴 월드컵 대회 준비에 보다 큰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안타깝게도 정치적 고려 때문에 대회 준비는, 특히 경기장들의 건설은 거듭 미뤄졌다. 경기장처럼 큰 구조물은 시간적 여유를 갖고 지어야 제대로 지을 수 있으므로 걱정스럽기도 하다.

경기장을 짓는데 돈을 너무 아껴서 초라하게 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락은 사람들의 삶에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보다 훨씬 큰 영향을 미쳐왔다. 현대에선 더욱 그러하니 오락 산업은 어느 사회에서나 가장 빠르게 커지는 분야이다. 그리고 오락 산업에서 운동 경기가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커지고 있다. 방송국들이 운동 경기 중계에 엄청난 돈을 들이는 것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운동 경기는 실시간으로 보아야 제맛이 나므로 시청자들에겐 다른 프로그램에 우선한다. 경기장들을 지을 때 우리는 몇십년 뒤에도 쓸모가 있도록 튼실하고 유연한 경기장을 겨냥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깊은 불황을 맞았다는 사실이 그런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다. 소비가 갑작스럽게 줄어들었고 건설 경기가 아주 나쁜 상태이므로 경기장 건설은 경기(景氣)를 부양시키는 측면이 있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지구촌의 축제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 애국자가 되어 우리팀을 한껏 응원할 것이다. 민족주의적 감정을 내뿜는 일은 언제나 크게 즐거운 일이다.

정치나 경제 등 다른 분야에서는 민족주의적 감정을 분출하기가 어렵다. 새로운 범지구적 질서의 출현을 해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스포츠에서만은 그런 염려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한점 그늘 없이 우리팀을 맘껏 응원할 수 있다. 월드컵이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과정을 촉진시킨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든든하기 때문이다.

복거일<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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