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함재봉/어쨌든 투표는 꼭 해야한다

  • 입력 1998년 6월 3일 19시 43분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이번 6·4 지방선거의 투표율이 유례없이 저조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주위 사람들에게 누구를 찍을 것인지 물어보면 대부분 관심이 없다고 하거나 매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이번에는 아예 투표를 하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아니,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그토록 애쓴 것이 얼마나 된 일이라고, 그래 벌써 민주주의의 기본권이며 신성한 임무인 투표를 포기한단 말인가.

그런데 사실 더욱 난감한 일은 정말로 무슨 기준으로 누구를 찍어야 하는지, 왜 투표를 꼭 해야 하는지 설득력 있게 말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운동과정의 혼탁함과 저질성을 생각하면 정말 투표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저질후보 발 못붙이게▼

유세장에 돈봉투가 난무하는가 하면 선거 운동기간은 정책대결보다는 상대방 후보의 사생활과 과거를 들추면서 인신공격을 하는 일로 소일하였다. 정치권이 유권자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철저하게 식상하고 등을 돌리게 한 것이다.

정치권은 또 후진국 수준의 선거운동 양태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번 선거의 의미 자체를 철저하게 왜곡해왔다.

지방자치 선거는 어디까지나 특정 지역의 권익과 이해를 위해 일할 수 있는 일꾼을 뽑는 절차다. 따라서 그 지역민들의 애환과 요구사항, 필요사항을 가장 잘 알고 그것들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뽑아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번 선거를 중앙정치의 대리전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지자체 선거를 여야간의 세력다툼, 중앙정치권의 정계개편의 도구로 사용하고자 모든 수단을 동원하였고 후보들도 지방자치 단체의 후보라기보다는 특정 중앙당의 후보로 행세하는데 모든 역량을 기울였다. 이렇게 할 바에야 과연 지방자치 선거를 따로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회의마저 든다.

그러나 어쨌든 투표는 반드시 해야 한다. 민주시민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치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견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고대 아테네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것이라고 자부한 이유도 그들의 도시국가는 자발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들에 의해 법을 제정하고 통치를 해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은 수천년을 지나는 동안 조금도 퇴색하지 않고 오늘날의 근대시민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 ‘시민’을 시민답게 하는 것은 ‘참정권’을 가장 중요한 권리요, 임무로 여기는 사고방식이다.

투표를 안하는 것도 일종의 정치적 의사표시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참정권을 포기하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의도대로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와 국가가 운영되는 것을 용인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유권자의 무관심은 후보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의지와 요령대로 정치를 끌어갈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무관심,정치후퇴 불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유권자의 무관심 역시 오늘날 한국 정치가 이처럼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데에 일조를 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만일 우리나라에도 강력한 시민사회가 존재하면서 정치권에 지속적으로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이번 선거가 이처럼 타락하는 것을 방지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투표권마저 포기한다면 시민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민주주의는 참으로 운영하기 힘든 제도다. 정치인과 시민 모두 적극적인 참정권 행사를 통하여 팽팽한 긴장관계가 유지될 때 비로소 꽃피울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다시 한번 우리 모두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줄 때다. 투표하자.

함재봉<연세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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