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밀레니엄]2091년 되살아난 냉동인간

  • 입력 1998년 4월 6일 08시 34분


전시관은 멀리서도 이내 눈에 띌 만큼 웅장했다.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모형 우주선은 고딕 사원의 첨탑을 연상시킬 만큼 빼어난 몸매를 지녔다. 하긴 둘 다 하늘 속 세계를 지향했다. 하나는 천국을, 다른 하나는 외계를.

택시가 전시관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을 만든 사람들이 지닌 엄청난 지식과 자원이 점점 짙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가장 세차게 압박해온 것은 그들의 자신감이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택시를 세웠다.

실은 바로 그것이, 그가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줄곧 그를 압도했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지닌 그런 자신감은 자원하지 않은 시간여행자인 그에겐 21세기 사람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다가왔다. 핵 전쟁의 음산한 위협과 자연 환경의 끊임없는 신음 속에서 살았고 모든 가치들과 기준들이 단단한 바탕을 잃은 20세기에선 그런 자신감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특히 ‘IMF’란 말을 일상어로 만든 경제 공황을 겪던 한국 사회에선.

거의 한 세기 앞의 미래로 시간 여행을 한 사람에겐 모든 것들이 낯설고 신기했다. 그러나 그는 그리 어렵지 않게 낯선 기술들과 기구들에 익숙해졌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낯설고 신기한 기술도 본질에선 그리 크게 바뀌지 않았음이 드러나곤 했다. 성층권으로 치솟는 로켓으로 두 시간 만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서울로 오는 것은 제트기에서 한나절을 보내는 것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었다. 화성의 올림퍼스 몬스 호텔 전망대에서 본 일몰을 제주도 성산 일출보다 훨씬 기억할 만하겠지만, 신혼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탐험 대상은 풍경이 아니라 배우자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아내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의 몸이 한순간 굳었다. 이어 그녀가 벌써 예순 몇 해 전에 죽었다는 사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상실감이 가슴을 비우듯 채웠다. 이 세상에 나온 지 두 달이 채 안됐으니, 아내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가슴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당연했다.

혼자서 본다는 사실이, 그리고 나중에라도 아내에게 본 것들을 얘기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한순간 그의 마음을 시들하게 했다. 실은 그런 시들함엔 가벼운 죄책감까지 묻어있었다. 어려운 시절에 어린 자식들을 남기고 혼자 일찍 죽었다가 뒤늦게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 어쩐지 겸연쩍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미국에서 성공한 교포가 자서전을 쓰는 것을 돕던 참이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이 몬 차를 탔다가 변을 당했다. 들것에 실리면서 목숨이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느낀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리고 93년 뒤에 이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외아들을 잃게 된 그 교포가 아들을 냉동 보관해서 미래의 의료 기술에 기대를 걸어본 것인데, 아들만 그렇게 하기가 미안했던지, 그까지 함께 냉동한 것이었다.

아내의 모습이 차츰 멀어져갔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그는 손등으로 이마의 진땀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 매캐한 기운이 살짝 어린 공기를 깊이 마셨다. 아, 살아있다는 것은…. 문득 생각이 아직 냉동고에 든 교포 아들에게 미쳤다. 냉동 인간들은 어느 사회에나 달갑지 않은 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냥 냉동고에 남아 다음 세대로 인계되었다. 그가 되살아난 것은 그가 소설가라는 사실 덕분이었다. 한 일간지가 22세기 특집을 마련하면서 ‘20세기 사람이 맞는 22세기’를 주제로 뽑았던 것이었다.

어쨌든, 그가 갖가지 기구들을 쓰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것들을 쓰는 데는 그것들을 움직이는 과학적 원리들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그는 다행스러웠다. 하긴 20세기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를 쓰는 사람들이 그것들의 작동 원리는 제대로 알고서 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지적 풍토는 사뭇 달랐다. 이곳에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학의 힘과 혜택에 대해서 큰 믿음을 지녔고 사회의 진보에 대해서도 큰 희망을 내비쳤다. 모든 분야들에서 상대주의가 주류를 이루었고 적잖은 사람들이 태연하게 과학을 여러 담론들 가운데 하나로 격하시킨 20세기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풍토였다. 그리고 그런 지적 풍토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만들었고 그들의 자신감을 키웠다.

그는 그런 믿음과 자신감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 알아보려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글들을 읽었다. 맨먼저 눈에 띈 것은 그가 냉동인간으로 지낸 90여 년 동안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들에서 엄청난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런 믿음과 자신감이 모두 설명될 수는 없었다. 인류 사회는 20세기도 21세기에 못지않는 발전 속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며칠 전 그는 그런 현상을 설명할 만한 단서를 얻었다. 과학의 발전 과정을 요약한 글에서 그는 20세기 물리학의 중심적 과제였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통합 이론’이 나왔다는 것을 읽었다. 그리고 쿼크보다 작은 물질 단위인 ‘스나크’가 발견되었고, 스나크의 특질들이 통합 이론을 떠받쳐서, 통합 이론은 물리학자들이 추구해온 성배(聖杯)인 ‘궁극적 이론’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에겐 그런 사정이 이곳 사람들이 과학에 대해 보이는 믿음과 사회적 진보에 대해 보이는 자신감의 원천인 듯했다. 그리고 그런 믿음과 자신감은 활발한 외계 탐험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20세기와는 달리, 이곳에선 외계 탐험에 쓸 자원을 지구 위의 문제들을 푸는 데 쓰자는 주장은 나오지 않는 듯했다.

그가 죽었을 때는 월면기지의 건설조차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았었다. 이제는 목성의 위성들에 기지들이 건설되었고 별나라로 우주선을 보낸다는 계획이 구체적으로 마련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경이로운 발전이었다. 별들 사이의 거리가 하도 멀어서, 20세기의 전문가들은 별나라로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 일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다.

전시관 앞에 다다르자, 그는 숨을 고르면서 모형 우주선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의 장엄한 상징성이, 그리고 우주선을 타고 아득한 세상으로 떠날 탐험가들의 열정이, 그의 가슴을 따습게 했다.

“아마도 이런 것이었으리라, 바다 너머 먼 대륙으로 무역선들을 보낸 사람들이 느낀 것이.”

자신도 모르게 그는 중얼거렸다. 18세기 유럽 사람들도 자신들이 ‘궁극적 이론’을 발견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뉴튼이 세운 체계는 그리도 우아하고 보편적이었고, 그것을 만들어낸 사회의 믿음과 자신감은 적극적인 해외 진출로 나타났었다.

“누가 감히 이 사람들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오만하다고, 또는 순진하다고. ‘통합 이론’이 ‘궁극적 이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들어.”

그는 떠올렸다. 예술가들은 열정의 가치를 깊이 새기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회의가 지혜로, 그리고 냉소가 세련으로 여겨진 풍토에서 살아온 그에겐 이곳 사람들의 우직한 열정이 그리도 풋풋하게 느껴졌다. 가치 있는 일들은 대체로 우직한 열정이 이루는 법이었다.

그는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사원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KFC 우주 탐험 전시관’안으로 들어섰다.

[과학자-작가 약력]

▼과학자 김제완

△32년 경북 상주 출생 △58년 서울대 졸 △67년 미국 컬럼비아대 박사 △현 서울대 물리학과 명예교수, 아태이론물리센터 상임이사 △저서 ‘빛은 있어야 한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 등

▼작가 복거일

△46년 충남 아산 출생 △67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 △87년 장편 ‘비명을 찾아서’로 데뷔 △장편소설 ‘높은 땅 낮은 이야기’ ‘역사속의 나그네’, 산문집 ‘쓸모없는 지식을 찾아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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