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원점에서 다시 시작하자

  • 입력 1998년 3월 31일 20시 20분


오늘로 본보가 창간 78주년을 맞는다. 긴 세월이다. 그동안 본보는 말 그대로 민족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 고통과 환희를 함께 해왔다. 동아일보 78년의 발자취는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 78년의 발자취였고, 동아일보의 지면은 한국인이 겪어온 풍상을 낱낱이 기록한 민족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본보가 창간 78주년을 맞는 오늘 이 시각, 나라 형편을 되돌아보면 암담하다. 가슴은 한없이 무겁고 답답하다.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또 한번의 벅찬 시련과 도전이 지금 우리를 덮치고 있다. 이 시련을 극복하고 눈앞에 닥친 21세기를 민족이 다시 한번 도약하는 희망의 세기로 만드느냐, 아니면 시련에 굴복하여 영영 실패한 민족으로 세계 역사에 기록되느냐는 기로에 국가와 민족이 서 있다.

새로운 천년의 도전, 세기의 도전이 우리 앞에 버티고 있다.

▼ 곳곳에 이완현상 ▼

대한민국 건국 50년이 되는 올해는 그런 점에서 한국과 한국인에게 더할 수 없이 중대한 의미를 갖는 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IMF)체제라는 낯선 충격이 우리의 삶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몰아오고, 정치적으로는 50년만의 여야간 정권교체로 들어선 ‘국민의 정부’가 강도높은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국민은 그 개혁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닥칠 내일이 어떤 것일지 알 수 없는 불안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본보 발행인의 지난 1월1일자 연두제언(年頭提言)과 본란이 거듭 지적하고 촉구했듯이 지금 우리의 국가적 최우선과제는 무너진 경제를 되살려놓는 일이다. 하루 빨리 이 숨막히는 IMF터널을 벗어나는 일이다.

그러자면 국민적 역량과 지혜를 한곳으로 집중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넉 달 전 IMF구제금융체제가 막 시작될 때만 해도 ‘시련을 극복하자’는 국민적 열기와 합의는 뜨겁고 단단했다. 국민 모두 너나없이 국난극복을 외치며 고통분담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금모으기라는 국민적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돼 외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지금은 IMF개혁이 본격화하고 불황 속의 고통이 장기화하면서 계층간 분열 조짐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미 실업자가 하루 1만명씩 쏟아지는 가운데 이대로 간다면 조만간 실업률 12%에 2백60만명의 실업자가 거리를 헤맬지도 모른다는 비관적 예측까지 나오고 있다.

노숙자가 늘고 자살과 생계범죄가 줄을 잇고 있다. 학교문을 나선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더구나 이 고통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전망이 서민들을 더욱 우울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편에서는 외채 만기연장으로 숨통이 다소 트이면서 위기불감증이 확산되고 있다. 백화점 외제상품 코너는 다시 붐비기 시작하고 고급 술집도 언제 불황이 있었느냐는 듯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다. 국가경제는 여전히 위기상황인데도 사회적 해이가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수요창출을 위해 건전한 소비는 오히려 권장해야겠지만 분수모르는 지나친 호화사치와 과소비는 곤란하다.

강도높은 구조조정으로 국경없는 시대의 가혹한 국제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할 기업들은 어떤가. 아직도 자발적인 개혁을 머뭇거리며 시대적 개혁요청에 반발하는 몸짓을 보이고 있다. IMF의 이행조건에는 문제가 없지 않지만 자유시장경제 등 세계화프로그램과 기업체질개선을 통한 경제질서 개편은 IMF의 권고가 없더라도 우리 스스로 진작 추구했어야 할 정책들이다. 이 절박한 개혁이 저항으로 무산된다면 한국경제에는 미래가 없다.

정부의 개혁정책도 그렇다. 이른바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대원칙만 제시했을 뿐 구체적인 수단과 우선순위 시행단계 속도 결과예측 등 정교한 실행 프로그램을 내놓지 못한 채 혼선을 야기해 국민적 동의와 동참을 어렵게 하고 있다.

IMF위기의 본질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고 극복 이후의 우리 삶은 어떤 모습일지, 그에 대한 청사진과 시간표를 분명히 제시하고 설명하지 않는 한 고통분담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개혁을 앞장서서 이끌어야 할 정치권의 행태는 더욱 걱정스럽다. 공동정권이라는 한계에 여소야대라는 제약까지 겹친 김대중(金大中)정부는 야당과의 협상에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야당은 야당대로 국가적 과제보다 당리당략을 우위에 두는 구태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여야는 총리국회인준문제 북풍 정계개편 등 정치적 쟁점에만 매달려 사사건건 정쟁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정치권이 오히려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 우리는 해내야 한다 ▼

이래서는 안된다. 나라 분위기가 이래가지고는 경제살리기고 위기극복이고 무엇 하나 될 일이 없다. 정치인 관료 기업인 국민 모두가 다시 한번 원점(原點)에 서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지금 이 시점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할 때다.

나라를 이렇게 놔둘 수는 없다. 여기서 주저앉아 파탄난 나라를 후손에게 물려줘서는 안된다. 어떻게 가꾸고 지켜온 우리의 공동체인가를 되돌아보고 다시 한번 결의를 다져야 한다. 위기를 딛고 일어서는 한국인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증명해 보여야 한다.

위기극복은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대신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의 힘으로 해내야 할 일이다.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다시 일어서자. 우리는 해내야 한다. 해낼 수 있다. 동아일보는 국민의 곁에서 희망과 고통을 함께 하면서 이 일에 앞장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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