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한수산/국민의 마음 한데 모아 달리자

입력 1998-03-11 20:11수정 2009-09-25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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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또 3월이 오고, 다시 또 경주는 내 안에서 새순을 내민다. 동아마라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3월도, 동아마라톤도 예년같지가 않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니라더니…. 나라의 주름살이 동아마라톤에까지 퍼져서, 늘 그해 세계최고기록을 만들곤 하던 대회, 한국최고기록을 경신해 가던 69성상의 대회가 올해는 외환사정으로 규모가 축소된다는, 아쉽고 아픈 소식이다.

▼ 1미터마다 「사랑의 1원」 ▼

그러나 놀랍게도 기적은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어쩐 일인가. 올해에는 마스터스대회에의 참가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다 같은 마음, 무엇이 다르랴. 이것 또한 ‘금모으기’와 다를 바 없는 ‘마음모으기’가 아닌가. 그렇다. 다시 뛰자. 이 마음을 담아서 뛰자. 지난해에는 ‘백혈병 어린이 돕기’ 1미터1원 사랑의 마라톤을 달리더니 올해는 ‘IMF 실직자 자녀 등 불우이웃 돕기 모금’에 나선다고 한다. 내가 뛴 1미터가 사랑의 1원이 되어 날아 간단다.

마라톤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동아마라톤은, 온통 감동 그것으로 이어진 고리들이었다.

황영조에게 있어 동아마라톤은 무엇일까. 영광과 좌절이 함께했던 대회였다.

91년 동아마라톤 첫 풀코스 도전에서 3위 입상으로 날개를 단 그는,‘벳푸’로 ‘몬주익’으로 자신의 화려한 비상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96년 바로 이 대회에서 우리의 마라톤 거인은 통한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불국사를 돌아내려온 평지 코스에서부터 다리를 절름거리기 시작한 황영조가 뒤늦게 스타디움으로 들어설 때 관중은 그의 순위가 아닌 완주의 투혼을 향해 눈물 글썽이며 박수를 보냈었다.

‘마의 15분 벽’에 걸려 있던 한국마라톤을 84년 대회에서 끌어올린 이후 90년대의 동아마라톤은 10분대를 넘어선 김완기 이봉주가 속속 세워 올리는 한국최고기록의 순간들에 휩싸인 영광의 나날들이었다.

왜 우리는 달리는가.

마라톤은 혼자다. 볼을 건네줄 선수도, 센터링을 올려줄 동료도 없다. 영혼과 육체를 온통 스스로 불의 심판에 내던지는 42.195㎞의 담금질이다. 오직 자신의 숨소리, 흐르는 땀, 목이 아프게 치밀어 오르는 거친 목마름이 있을 뿐이다.

자신과의 원초적 만남, 기쁨도 고통도 오직 자신만의 몫인 이 가장 단순하고 가장 격렬한 경기, 마라톤이 늘 인생과 견주어서 이야기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동아마라톤이 주는 또하나의 즐거움인 마스터스대회의 그 열기는 느껴 본 사람만이 안다. 친구와 가족과 어울려 벚꽃 망울이 맺히는 길을 뛰는 사람들의 그 물결, 그 행렬, 그 환희.

지난해 경주시민운동장에서 옆사람과 나누던 한 육상연맹 간부의 말을 나는 지금도 웃으며 떠올린다.

▼ 감동이 넘실대는 慶州로 ▼

“애비가 물 한그릇 떠오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 딸년이, 새벽부터 일어나 도시락 싸들고 지금 저어기 어디 와 있어. 무슨 연예인 애들이 뛴다고, 그거 사인 받는다고 와 있어, 허허허허허.”

마스터스대회에는 이런 또다른 즐거움이 있다.

문득 화가 고갱을 생각한다. 고갱이 묻혀 있다는 남태평양의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치자꽃 향기가 어지럽더라는 그 무덤가. 언젠가는 가보리라, 가서 나도 그 치자꽃 향기에 취하리라. 꿈꾸면서 화첩을 넘기곤 하는 내가 좋아하는 화가 고갱.

무엇이 다르랴. 봄이면 경주로 가는 마음도 한결같다. 나를 어지럽게 할 어떤 아름다운 감동들이, 경주의 69회 동아마라톤에서는 또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한수산(세종대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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