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민병욱/「블라인드」정치

  • 입력 1998년 3월 2일 08시 10분


경주마에게 다는 곁눈 가리개를 블라인드(Blind)라고 한다. 옆에서 뛰는 다른 말에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결승점만 보고 달리게 하는 장치다. 경주마가 무섭게 달리는 옆의 말을 보면 부딪쳐 다칠까 두려워 멈칫거리기 때문에 곁눈을 가려 앞만 보고 뛰게 하는 것이다.

포커 게임에도 블라인드라는 것이 있다. 패는 한 장도 보여주지 않은 채 돈을 태우는 도박이다. 상대가 무엇을 쥐었는지, 자신의 패가 상대의 끗발보다 높은지 낮은지도 모르고 순전히 감(感)으로 판돈을 키워 상대를 죽이는 것이 최선이다. 직업도박꾼이 아닌 다음에야 불확실하기 그지없는 일종의 담력 게임이다.

지금 우리 정치가 혹시 이런 블라인드 정치가 아닌가 싶다. 여는 여대로, 야는 야대로 제 갈 길만 가고 있다. 나라와 국민의 형편을 살피는 것도 그만둔지 오래인 것 처럼 보인다. 상대의 생각과 입장은 무시한 채오직 ‘밀리면 죽는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서로 떼밀기와 발목잡기로 일관하고 있다.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 인준문제가 지금 경주마의 블라인드 노릇을 하고 있다.

어쩌면 여야 모두 지금처럼 가파른 상황이 되리라고 예상 못했을 수도 있다. 작은 틈새가 하루아침에 큰 구멍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2월25일 김대중(金大中)제15대 대통령이 취임한 날 많은 사람들은 다소 시끄럽긴 해도 총리 인준문제가 국회에서 처리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것이 한나라당의 강경자세로 무산되자 비난은 이 거대야당에 쏟아졌다.

“‘김종필총리’는 대선공약으로 이미 국민의 인준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이 이를 트집 잡는 것은 50년만의 여야간 정권교체에 대한 시샘이자 소수여당에 대한 횡포다” “야당이 콩가루 모양이 된 집안사정을 감추려고 국민의 축하 속에 출범하는 새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따져보면 야당이 거듭 김종필총리 인준반대를 외쳐 왔으므로 이를 진작 매끄럽게 설득하지 못한 새 정부에도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실책은 별문제가 안됐다. 많은 외국 경축사절이 들어와 있는 마당에 이 무슨 추태냐는 ‘국민적 감정’이 한나라당을 코너로 몰았다. 여기에 힘을 얻었는지 김대통령은 야당총재들을 청와대로 불러 인준안의 적법처리를 당부했고 또 그렇게 결말이 났다. 다소 꼬이긴 했지만 일은 그런대로 풀리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2일 인준안의 국회처리를 앞두고 김대통령은 전격적으로 정부조직법개정안을 공포, 나라를 ‘사실적으로나 법적으로 분명한 행정 공백’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야당의 인준거부로 인한 국정공백 사태를 더욱 확연히 보여줘 야당을 밀어붙이려는 생각이었는지 모르나 이것이 오히려 야당의 큰 반발을 샀다. 지금 야당은 인준안을 ‘확실히’부결시키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둘 다의 잘못이다. 모두 대화와 타협을 외면했다. 겉모습 대화는 있었을지 모르나 서로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의 블라인드 게임을 벌여 상황을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국정공백을 더이상 방치할 수 없어 법을 공포했다”거나 “기권이든 백지투표든 다 적법절차”라는 식의 입씨름만 벌이고 있다.

2일엔 이런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여권은 다시한번 진지하게 ‘김종필총리’의 당위성을 설득해야 한다. 야당은 끝내 여권의 논리를 수긍할 수 없다면 정정당당하게 무기명 비밀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켜야 한다. 블라인드 정치를 계속하면 결국 다치는 것은 나라와 국민이다.

민병욱<부국장대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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