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납치사건]공작선 한척뿐이었나?

  • 입력 1998년 2월 21일 20시 10분


중앙정보부가 김대중(金大中)씨를 납치하는데 동원한 배는 ‘용금호’ 한 척뿐이었을까. 본보가 단독 입수한 ‘KT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에는 ‘공작관련 선박 처리상황’이라는 보고서가 별도로 수록돼 있다. 이 보고서에는 납치사건 후 용금호에서 이름을 바꾼 ‘유성호’뿐만 아니라 ‘풍진호’와 ‘성진호’에 대한 △제원 △운영방법 △공작상황 △공작원처리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문서에 따르면 풍진호는 44년 건조된 5백78t급 화물선으로 70년 중정이 2천2백만원에 매입한 것으로 돼 있다. 성진호의 제원은 자세히 기록돼 있지 않지만 76년 매각 당시 8천만원 가량의 대금을 받고 판 것으로 볼 때 건조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신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문제는 보고서에 왜 풍진호와 성진호에 대한 보고가 포함됐느냐 하는 점이다. 만일 용금호만 납치사건에 동원됐다면 나머지 두 척에 대한 관리 및 매각 현황을 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할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중정이 김씨를 일본에서 납치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 중정이 운영하던 나머지 두 척의 대북공작선을 용금호와 함께 대기시켜 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73년 8월8일 오후 김씨가 납치된 직후 일본 전역에는 경찰의 검문검색이 강화된 상태였다. 김씨도 귀가 직후 “납치된 뒤 오사카(大阪)근방까지 온 듯했는데 이때부터 검문이 시작된 것 같다. 차가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고 납치과정을 증언했었다. 따라서 중정요원들이 납치 직후 다음 목적지인 오사카 안가(安家)쪽이 경찰의 검문으로 봉쇄됐을 경우에 대비, 사전에 제2, 제3의 장소를 물색해 놨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납치가 순조롭게 이뤄져 ‘원안(原案)’대로 용금호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에 대해 납치사건 당시 중정 차장보였던 이철희(李哲熙)씨는 “납치에 동원된 배는 분명히 용금호 한 척이었다”며 “보고서에 다른 두 척의 배가 포함된 것은 중정이 관리했던 공작용 선박에 대한 단순한 현황보고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공작용 선박 3척에 대한 관리보고를 끼워넣었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했다는 것이 이씨의 주장이다. 한편 용금호를 포함한 문제의 배 3척은 75년과 76년 해체되거나 매각돼 공작선으로서의 수명을 마감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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