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납치]74년 서울지검부장『日과 마찰우려 수사종결』

  • 입력 1998년 2월 19일 19시 41분


“광범위하고도 치밀한 수사를 하였으나 아무런 자료를 포착하지 못하였고… 결국 현단계에서는 본건 용의자들이 범행에 가담하였다는 자료가 없어 내사를 중지한다.” 74년 8월14일 당시 서울지검 정명래(鄭明來·67)공안부장은 김대중(金大中) 납치 사건에 대해 ‘어정쩡한’수사 종결을 발표한다. 사건이 일어난지 1년만의 일이다. 82년 공직에서 물러나 현재 변호사로 활동중인 정씨는 19일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수사본부가 차려진 마포서에는 중앙정보부 연락관이 상주해 있었으며 경찰의 수사 내용과 수사 계획까지 중정으로 보고가 된 것으로 안다”며 중정의 수사 개입을 간접 시인했다. 그는 또 “수사과정에서 가장 크게 고려했던 점은 특정인(박정희·朴正熙대통령)에 대한 비호보다는 일본과의 외교 마찰이었다”고 회고했다. “수사본부에 격려차 두차례 나갔을 뿐 김대중씨를 한번도 대면하지 않았다”고 밝힌 정씨는 “수사 내용의 핵심 부분이 중정에 의해 고의로 누락됐는지는 모르지만 경찰의 보고서에는 중정의 개입을 의심할 만한 부분은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내 수사가 약 6개월간 별다른 성과없이 표류하는 동안 일본에서는 한국대사관 1등서기관이었던 김동운(金東雲·본명 김병찬)의 지문이 발견되는 등 중정의 개입 혐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났고 한일간 외교 문제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였다. 결국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金鍾泌)씨가 일본 총리를 만나 양국이 동시에 이 문제에 대해 수사를 종결하기로 합의했으며 정씨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내사 종결을 선언했다. 정씨는 “당시엔 일본과의 외교 문제가 가장 중요했었고 만약 중정의 개입 부분이 밝혀졌을 경우 국제적으로도 한국이 상당히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했을 것”이라며 “김대중씨가 당한 일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가슴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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