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박권상/한단계 발전한 「한국정치」

  • 입력 1998년 1월 14일 19시 42분


“아시아인들은 자신들이 유럽과 다른 문명,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유럽의 명예회원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서구사람들이 믿고 있는 민주주의는 그들이 북미나 유럽에서 경험한 것이다. 러시아가 유럽권에 속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인권을 내건 서구인들에게 총 한 방 쏘지 못한 채 스스로 붕괴하였다.” ▼ 정권교체 민주기틀 마련 ▼ 싱가포르의 지도자 리콴유(李光耀)의 말이다. 그는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서구 민주주의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 중국의 예에서 보듯 서구 민주주의를 거부한 채 가부장적 지도원리로 시장경제를 번영시키고 있다는 것이 개발독재를 합리화한 것이다. 과연 서구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병행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선거 과정과 결과를 보면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동아시아에서도 평화롭고 질서있는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고 서구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그렇다. 헌정사상 초유의 야당집권은 단순한 정권교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리콴유식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세계를 향해 민주주의는 지역 문명 전통을 뛰어넘는 보편적 가치임을 웅변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국민이 정부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교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느냐다. 지난 대선은 바로 국민이 지도자와 정치세력을 창출할 수 있는 나라의 주인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우리가 외환위기로 국가파산선언 직전에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김대중차기대통령의 수습 노력이 크게 주효한 것으로 평가하지만, 민주우방국들이 우리 국민의 슬기롭고 용기있는 결단을 평가한 덕분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 국내 기득권 세력은 오랫동안 ‘한국에서 정권교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신화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막강한 권력이 여당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돈 선전 정보 조직 등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여당이 대선에서 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같은 나라에서도 1832년 선거법을 개정하기 전까지는 어떤 정부도 선거에서 진 일이 없다. 이른바 ‘명목상’민주주의의 단계였다. 자유민주주의 제도는 법으로 마련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관권개입과 매수행위 등으로 후보자들에게 자유롭고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명목상’민주주의 단계를 넘어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진정한 민주주의는 실현된다. 그 기준에서 볼 때 우리는 지난 대선을 통해 진정한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선거과정을 보더라도 지난 대선은 여야가 비교적 공정한 조건 속에서 치러졌다. 여권의 분열로 야당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탓도 있지만 관권과 금권에 의한 선거비리는 예전에 비해 현저히 줄었다. 유권자들은 대규모 옥외집회가 아니라 텔레비전 토론을 통해 후보들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인물과 정책을 평가할 수 있었다. ▼ 「변화속의 안정」 추구할때 ▼ 선거풍토가 개선된 데에는 이회창후보의 깨끗한 정치를 지향하려는 의지도 한몫했다. 집권당 후보였던 그는 여권 프리미엄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텔레비전 토론을 수락함으로써 텔레크라시가 우리 정치문화로 자리잡게 하는데 기여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선거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함으로써 민심안정을 선도하여 좋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이렇듯 정권교체에 성공함으로써 리콴유의 발전모델을 극복하여 정치의 질을 한단계 높였다는 것을 자랑해도 좋다. 또한 정권교체로 정경유착을 막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야당의 집권과 더불어 기득권층 위주의 논리였던 ‘안정 속의 변화’라는 공식은 ‘변화 속의 안정’으로 바뀌게 됐다. “적절한 개혁의 수단을 갖지 않는 보수주의는 자기보존의 수단도 없다.” 보수주의 원조 에드먼드 버크의 명언이다. 박권상<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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