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호남평야]겨울들녘,그 충만한 생명의 합창

  • 입력 1997년 12월 17일 20시 49분


아 이제는 한적한 빈들에 서보라 xxxxxxxxxx 달 가고 해 가면 별은 멀어도 산골짝 깊은 골 초가마을에도 봄이 오면 가지마다 꽃잔치 흥겨우리 아 아 아 이제는 손모아 눈을 감으라 고향집 싸리울엔 함박눈이 쌓이네 ―가곡 「고향의 노래」중에서 남도의 빈들에 솜같은 숫눈이 내린다. 땅과 길이 지워지고 하늘과 땅이 만난 지평선도 사라진다. 가끔 새들이 포르르 눈속으로 날아 오른다. 징게 맹개 외얏밋 들(「김제 만경 너른 들」이라는 뜻의 사투리). 시작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 아득하다. 육자배기 가락같이 유장하고 서편제 자락같이 부드러운 선. 빈들 호남평야는 지금 가을 황금들판보다 더욱 넉넉하고 아늑하다. 모든 것 다 줘버려 더욱 충만하다. 자식들 다 키워 이젠 마른 논바닥처럼 말라 버린 칠순 어머니의 빈젖처럼. 사는게 막막하고 가뭇없이 허허로울때 저 빈들의 끝에 가 서보라. 끝없는 들판과 아득한 서해바다가 만나는 김제 진봉의 망해사에 가서 종일토록 지평선과 수평선을 번갈아 바라보라. 붉은 해가 두둥실 들판에서 떠올라 주루룩 바닷속으로 미끄러져 사라지면 왠지 모를 설움이 복받쳐 오른다. 호남평야는 동서 50㎞ 남북 80㎞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들녘. 그중에서도 김제시 진봉 광활 만경면 일대는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승용차로 양쪽이 훤하게 트인 눈덮인 겨울 빈들을 천천히 달려보면 답답했던 가슴속이 시원해진다. 「그대 이제는 더 이상 날지 못하리」. 창공을 한번 날아본 자는 추락의 처절한 아픔을 안다. 우리는 그동안 허공에 사다리를 놓으며 살았다. 공중에 천년누각을 지으려 했다. 모든게 헛되고 헛된 한순간의 꿈. 사람은 산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발밑에 작은 돌부리 하나에 코가 깨진다. 삶은 위대하지만 하루하루 사는 삶은 하찮고 자잘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언제 힘있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나서본 적이 있던가. 언제나 팔 걷어붙이고 나서는 이들은 이름없는 민초들. 『쏴아』 한줄기 맑은 바람이 대숲을 흔든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서 더욱 꼿꼿하다. 물에 담긴 달은 가슴을 비워 더욱 아름답다. 눈속에 우우우 솟아오르는 푸른 아기보리들은 추운 겨울에 더욱 푸르다. 텅빈 충만. 겨울 빈들에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김화성기자〉 ▼가는 길▼ 호남평야는 행정상으로는 전주 익산 군산 정읍 김제의 5개시와 부안 옥구 완주 고창 등의 4개군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중에서도 가장 중심지는 역시 김제 만경지역. 김제는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김제 혹은 금산사 인터체인지에서 들어가면 된다. 김제에서 망해사까지는 약 18㎞. 서울∼김제고속버스는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있으며 호남선 기차도 1시간 간격으로 있다. 김제에서는 김제∼진봉간 시내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바다에 발을 적시고 있는 절 망해사(望海寺)는 백제 의자왕 2년(642)에 창건한 고찰. 들꽃같이 작고 단아하다. 망해사 뒤쪽으로는 서해의 낙조와 호남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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