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권희/「내일」이 무서운 기업들

  • 입력 1997년 9월 22일 20시 05분


『한국을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겠습니다』 열흘 전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국내외 경제전문가와 기업인들이 다수 참석한 한 행사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그의 취임 초기부터 참 여러번 듣던 이야기다. 그가 이런 연설을 하던 시각, 기업 현장에선 내년 투자계획 마련에 분주한 모습들이었다. 어느 기업 회의장면을 슬쩍 들여다보니 뜻밖에도 「어떻게 될까」 타령만 하고 있었다. 고심을 거듭해가며 때론 비장하게, 때론 자신만만하게 투자결정을 하는 장면은 없었다. ▼ 경제발목잡는 정부정책 ▼ 『연명(延命)전략에 연기(延期)전술이지요』 어떤 기업은 올해안에 매듭지으려던 몇가지 일들을 내년으로 미뤘다. 새로 일을 벌이지 않고 그럭저럭 꾸려나가기로 목표를 바꿔 잡은 것이다. 내일 일을 모르는데 어디다 돈을 퍼붓겠느냐는 이야기다. 기업 입장에서 이것저것 꼼꼼히 따져보고 위험을 감수해가며 투자결정을 한들 덜커덕 상황이 바뀌어버리면 다 망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계획」 「전략」 소리가 붙은 회의는 한두시간의 걱정 섞인 자유토론으로 바뀌기 일쑤. 불확실성의 시대다. 정도는 「아주 심각」하다. 이럴 때 인기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유동성이다. 포장이야 번듯하지만 바꿔 말하면 돈이다. 기계를 들여올지, 사람을 뽑을지 어느 것 하나 판단이 서질 않으니 돈으로 갖고있어 보자는 거다. 대외관계까지 감안하면 역시 달러화가 인기품목이다. 이런 생각들이 번지니 달러값은 더욱 오르게 마련이다. 불안한 달러값 움직임은 기업을 더 어지럽게 한다. 그야말로 악순환이다. 「어떻게 될까」 고심 대상은 수없이 많다. 대통령선거도 그중 하나다. 선거 결과도 그러려니와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터질지 불안해한다. 기아사태로 인해 더욱 커진 자금 외환시장 불안, 기업의 새사업 진출에 대한 정부당국의 무원칙한 태도 등도 불확실성을 키운다. 이런 불확실성을 줄여주는 일은 일차적으로 정부 몫이다. 기업환경의 불확실성이 적은 나라야말로 「기업하기 좋은 나라」다. 외국 기업인들은 『한국정부는 금융이나 세금 혜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기업하기 좋은지 나쁜지를 가르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게 아니다』고 말한다. 국내외 기업인들은 『정부의 자의적인 정책판단과 불안한 금융시장이 문제』라는 지적을 빠뜨리지 않는다. 요즘은 어떤가. 두달째 끌고 있는 기아 처리를 보자. 부도유예협약 자체가 자의적인 요소가 매우 많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됐다. 정부는 초기엔 「채권금융단과 기업간의 문제」라며 불개입을 외치다가 어느새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 일보다 「어떻게 될까」 걱정만 ▼ 경제정책 총수인 강경식(姜慶植)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이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시장원리는 어떤가. 시장원리에 따른다고 할 만한 시장이 한국엔 없지 않으냐는 비판적인 시각 외에도 「뭔가 책임질 만한 결정을 피하려고 할 때 꺼내놓는 방패막이」라는 의심도 많은 게 사실이다. 강부총리가 어떤 경우에 시장원리라는 말로 피해갈지, 그것조차 불확실하다는 푸념이 기업인들 사이에서 들리는 형편이다. 경제정책 당국자들은 이런 불평들을 들을 때마다 더 긴 해명을 해댄다. 이번엔 해명보다는 새로운 원칙, 꼭 지켜나갈 원칙을 보여줄 때다. 홍권회(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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