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수필]최명순/사라지는 「구석말」마을

  • 입력 1997년 8월 19일 07시 52분


지금 난지도 앞 상암동 산26 구석말은 야트막한 산에 오래된 재래식 집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어 여름엔 더욱 더 덥다. 하지만 11년전 우리가 이곳으로 이사를 한 뒤 이웃간에 다정다감하게 지내던 시절을 잊을 수 없다. 여름해가 느지막이 산턱을 넘으면 구석말 사람들은 일찌감치 저녁을 해 먹고 동네 어귀 버드나무 밑으로 모여든다. 아이들은 신발감추기 말뚝박기 한발뛰기 등 놀이를 하느라 떠들썩하다. 강아지들도 꼬리잡기 내기를 하며 멋대로 뛰어다닌다. 한구석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 대신 펼쳐놓은 은박돗자리에 소리할머니 영자엄마 문간방할머니 진주할머니 세아엄마 등 동네 아낙들이 둘러앉아 시시껄렁한 얘기를 펼친다. 아이들 자랑, 할머니들의 영감 흉, 젊은 여인들의 남편 흉, 건너말 누구네 며느리 칭찬, 어느 집 옆방에 새로 냉장고가 들어왔다는 등….모깃불 향기 속에 얘기가 무르익어가면 출출해진다. 영자네가 밭에서 참외를 따 내오고 소리할머니가 잘 익은 수박을 내다 갈라놓는다. 세아엄마는 야외용 버너를 들고나와 호박부침개를 부쳐 한 조각씩 돌린다. 어쩌다 내가 감자를 통째 삶아 한 바구니 가져가면 모두들 환호성이다. 어른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 하나씩 들고 후후 불며 껍질을 벗기는 모습은 그저 풍요롭기만 하다. 이게 불과 10여년 전 일이다. 지금은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됐지만 20년 전만 해도 상암동은 무척이나 깨끗한 샛강을 낀 조용한 마을이었단다. 소리할머니가 전하는 난지도는 끝이 안보이는 평지였으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채소로 강북지역의 수요를 거의 충당했을 정도였다 한다. 또한 고소한 맛으로 유명한 난지도의 땅콩은 늘 풍작이었고 식수와 용수로 사용된 샛강의 재첩 또한 그 맛이 일품이었단다. 지금은 이곳에 자동차면허시험장이 생기고 샛강위로 큰길이 나면서 쓰레기 산에서 풍겨오는 악취가 심해 방문을 꼭꼭 닫은채 여름을 지내야 한다. 그나마 이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때문에 99년까지 동네를 철거한다니 아쉽다. 매캐한 모깃불 향기 대신 악취속에 깊어가는 구석말의 여름밤이지만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니 고향을 잃는 기분이다. 최명순(서울 마포구 상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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