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반환 D-30]굴곡의 현대사 155년

  • 입력 1997년 6월 1일 08시 23분


19세기 중반 대영제국의 외상 팔머스턴경이 지적한대로 홍콩(香港)은 「불모지의 섬」이었다. 이 섬이 영국식민지가 된 것은 1842년 청조(淸朝)가 영국과 벌인 1차 아편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3년에 걸친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남경조약을 맺고 홍콩섬을 영구히 할양받았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중국과 아편을 거래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그러나 청조가 1833년 아편수입을 줄이기 위해 자르딘과 마티슨에도 판매권을 허용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1839년 청조의 린 체 수라는 관리가 외국상인의 아편공급을 포기토록 한 것이 아편전쟁의 원인이 됐고 1841년 영국은 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홍콩에 해군력을 파견, 이듬해부터 전쟁의 길로 들어섰다. 그후에도 영국은 청조가 아편판매에 대해 계속 문제를 삼자 1860년 2차 아편전쟁을 일으켜 북경조약을 맺고 광동성에 잇닿은 구룡반도도 영구할양 받았다. 1898년에는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제국주의 침입에 불만을 품은 한족(漢族)단체인 의화단이 북경에서 난을 일으켰다. 이를 청나라와 함께 진압한 영국은 청조와 2차 북경조약을 맺고 신계 란타오섬 등 홍콩 부속 도서들을 추가로 할양받는 대신 이 지역과 홍콩섬 구룡반도 등을 포함한 홍콩의 할양기간을 99년으로 바꿨다. 이후 홍콩은 영국 제국주의의 동방전진기지로 중국대륙으로 서양문물을 전하는 통로가 됐다. 2차대전말기인 지난 41년부터 45년까지는 일본이 중국을 점령함에 따라 홍콩도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46년 영국은 홍콩정청을 재정비했고 중국본토가 공산화되자 1950년부터는 공산정권인 중국과의 국경도 폐쇄했다. 그후 영국은 홍콩을 집중개발했으며 한국전쟁은 홍콩경제가 중계무역에서 제조업쪽으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자본주의체제하에서 홍콩(95년기준)은 아시아에서 도쿄(東京)다음가는 금융중심지로 눈부시게 성장했고 「동양의 진주」로 불리는 관광명소가 됐다. 95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2만3천2백50달러, 한해 교역액 3천6백60억달러, 관광객 1천만명, 카이탁 공항이용객 2천만명 등의 수치가 번영된 홍콩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지난 79년 鄧小平(등소평)이 홍콩총독과 반환협상을 시작했고 5년후인 84년 영국 대처총리와 중국 趙紫陽(조자양)총서기가 역사적인 「97년 홍콩반환에 관한 공동서명」에 조인, 97년6월30일 홍콩의 중국반환이 확정됐다. 이어 90년에는 홍콩의 장래헌법이 될 홍콩기본법이 마련됐다. 〈구자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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