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박철순 은퇴『영광-눈물의 마운드여 안녕』

  • 입력 1997년 4월 29일 19시 52분


「서울라이벌」 OB와 LG의 프로야구 경기가 열린 29일 잠실구장.

이날의 영웅은 승리투수도 결승타를 친 타자도 아니었다. 경기 후 홈팀 OB는 이례적으로 프랭크 시내트라의 「마이웨이」를 흘려보냈다.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OB LG팬 할 것 없이 마운드를 향해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곳엔 불혹을 넘긴 한 그라운드의 노병이 뜨거운 눈물로 답례를 보내고 있었다. 「불사조」 박철순(41·OB). 이날은 그가 선수로서 마지막 유니폼을 입은 날.

돌이켜보면 그의 30년 야구인생은 순간의 영광과 오랜 부상으로 쓰여진 한편의 드라마였다.

연세대 2년후배인 「무쇠팔」 최동원(39)의 그늘에 가려 벤치를 지켰던 암울한 시절. 그러나 공 빠르기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그는 지난 78년 한미대학선수권대회때 미국프로야구단 밀워키 브루어스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당시로선 쾌거. 그리고 그는 3년후인 81년에는 마이너리그 더블A에서 12승3패의 성적을 거두며 다승왕을 차지, 박찬호(24·LA다저스)보다 무려 10여년이나 앞서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거의 꿈을 키웠다.

그해 겨울 휴가차 귀국했던 그는 당시로선 최고 계약금(2천만원)과 연봉(2천4백만원)을 받고 갓 태어난 국내프로야구의 최고스타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프로원년인 82년 세계최고기록인 22연승의 신화를 창조하며 다승 방어율 승률 등 투수 3관왕과 MVP를 한꺼번에 거머쥔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핑크빛」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박철순이 있게 된 것은 그의 눈부신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83년 2월 대만 전지훈련중 허리부상으로 처음 쓰러진 그는 도저히 야구를 할 수 없다는 선수로서의 「사형선고」를 10여차례나 이겨내는 집념의 인생역정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혼과 재혼, 전처의 죽음. 선수단 이탈파동을 주도했던 지난 94년에는 자신이 옷을 벗으려 했지만 당시 윤동균감독만 중도해임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전처와의 사이에 난 두 아들도 은퇴식에 참가하기 위해 미국에서 건너왔어요. 윤감독도 참석했습니다. 80년대 중반부터 알게 된 백혈병 어린이들과 명진보육원생들도 왔구요.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이날 은퇴식은 팬들에겐 한국프로야구의 큰 별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자리였지만 박철순에게 있어선 바로 「화합의 한마당」이었다.

〈장환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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