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에세이/21세기 앞에서]제2의 이완용

  • 입력 1997년 4월 2일 19시 52분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년전, 우리는 서구 열강이 벌이는 식민지 쟁탈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고생하다가 결국 나라를 잃어버린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다. 민족 지도자들의 노력과 의병활동도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고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우리에게 나라를 지킬 만한 국력, 즉 정치력 군사력 경제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해방이후 수많은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온 국민이 합심 노력하여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90년대의 우리 현실을 구한말과 비슷한 상황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세계는 그동안 첨예하게 대립해 오던 냉전체제를 종식하고 이제는 바야흐로 경제전쟁의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 무역전쟁 갈수록 가혹 ▼ 지금 세계는 강대국간의 정치 군사적 경쟁체제에 의해 유지되던 질서가 무너지고 경제적 실리를 앞세운 새로운 경쟁에 돌입했다. 과거 강대국은 약소국을 자기 영향권에 두기 위해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군사적으로 보호해주었다. 반대로 약소국은 강대국의 보호와 지원을 얻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경제적 정치적 양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국가 생존조건은 지금 변하고 있다. 이념아래 보호되던 국가간의 조약도 상황이 변하면 한순간에 휴지조각이 되고 있다. 국제원조도 국가의 실리적 계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실정이다. 만약 무력전쟁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경제전에서는 우리가 전쟁이라고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순간에 마치 끓는 냄비 속에 갇힌 개구리처럼 무기력하게 당할 수 있다. 경제전쟁은 무력전쟁과는 달리 눈에 확연히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전쟁을 하고 있는지 또는 전쟁에 지고 있는 지도 모르면서 망해간다. 보이지 않는 이 전쟁의 패자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패자를 보호해줄 이념이나 당위성 따위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 우리나라 주력산업의 대부분은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예로 전자 자동차 조선 등 주요 산업의 핵심부품을 거의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는데 앞으로도 계속 그렇다면 우리의 대일 의존도는 더욱 깊어질 수 밖에 없다. 기계와 같은 자본재도 대부분 일본에서 들여오는데 이 수입대금이 대일무역적자에서 제일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부품과 기계의 전적인 대일의존은 우리의 큰 약점이다. 그러나 핵심부품을 만들 기술을 개발하고 기계를 만들 공장을 지으려면 장구한 시간이 걸린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 의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일본 경제의 호황 불황에 따라 우리의 신세가 좌우된다. 따라서 자칫 잘못하면 일본의 경제식민지가 될 수도 있음을 냉철히 인식해야 한다. ▼ 對日의존 심각한 지경 ▼ 우리는 지난날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 먹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를 매국노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1백년이 지난 지금이야말로 내가 김완용 박완용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한다. 제2의 이완용이 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때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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