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칼럼]역사 바로세우기의 끝

  • 입력 1996년 12월 20일 19시 33분


12.12, 5.18에 대한 법의 응징이 끝났다. 상고심이 남아 있긴 하지만 사실심리는 사실상 마감됐다. 12.12는 패악(悖惡)한 군사반란으로, 5.17과 5.18은 국헌을 문란케 한 내란으로 재확인됐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힘의 논리」가 쿠데타는 성공하건 실패하건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정의의 논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광주항쟁 평가 인상적▼ 사필귀정이다. 전직 대통령도 법을 어겼을 때는 현실의 법정에서 사법적 심판을 받는다는 전례를 세운 것은 소중하다. 무엇보다 그 암울한 시대를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죄스러웠던 세대가 이제서야 자식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 특히 쿠데타 권력에 대한 국민의 결집된 저항은 헌법기관에 준하여 보호해야 한다는 판결로 광주민주항쟁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것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그 준엄한 논죄에도 불구하고 양형(量刑)은 다감(多感)하고 관대했다. 이 이중성은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름의 과거청산을 내재적으로 규정해온 한계였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 모른다. 쿠데타 권력의 단죄라는 치열성에도 불구하고 법정에 시종일관 양심의 긴장이 결여돼 있었던 것도 그 한계를 간파한 쿠데타 주역들의 냉소주의 탓이었을 것이다. 당초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 잊지는 말되 과감하게 용서하고 화합하자던 반란과 내란이었다. 검찰은 이 노선에 따라 12.12에 기소유예를, 5.18에 공소권 없음을 선언했다가 대통령의 특별법제정 지시와 함께 태도를 일변했다. 헌법재판소조차 정치적 계산에 우롱당했다. 재수사의 발단은 盧泰愚(노태우)씨의 비자금 뇌관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법은 정치의 열화와 같은 대의명분에 굴절했다. 많은 사람들이 관측하고 있는대로 이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이 실제로 「사면을 전제로 한 재판」이었다면 형량에 대해 이런 저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차라리 「항장(降將)은 불살(不殺)이라 공화(共和)를 위해 감일등하노라」는 고색창연한 수사(修辭)의 묘미를 상탄(賞嘆)하는 편이 허탈의 늪에 빠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 항소심 판결의 색깔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쿠데타는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면서도 성공한 쿠데타의 처벌문제는 법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사람의 힘의 문제라는 논리로 힘을 사법(司法)적 정의(正義) 위에 앉혔다. 권력을 내놓아도 죽는 일이 없다는 원칙을 확립하는 것은 쿠데타의 응징 못지 않게 꼭 필요한 것이라는 논리로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법이 스스로 정치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정치성 시비여지는 흠▼ 全斗煥(전두환)씨에 대한 감형으로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이 가벼워졌다는 관측은 이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의 정치게임적 성격을 우회적으로 지적한 암시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법이 고무줄이 됐다면 불행한 일이다. 물론 쿠데타 권력의 단죄는 김대통령 특유의 정치적 승부수가 거둔 성과로 기록될 것이다. 그러나 그 과거청산작업이 정치성 시비의 여지를 남긴 것은 흠이다. 민주주의는 결국 법치주의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가 남긴 교훈일 것이다. 김 종 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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