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차분한 세밑 생각할때

  • 입력 1996년 12월 15일 20시 14분


올해도 이젠 보름밖에 남지 않았다. 지나간 3백50일이 뜻같지 않았던 아쉬움이 진하고 몇장 안남은 일력(日曆)이 오히려 무겁게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한해를 보내는 마음이 윤기(潤氣)롭지 못하며 듣고 보는 소식마저 한결같이 어두워 세밑의 황량함을 더한다. 그런데도 일각에선 여전히 과소비 우려가 적지않고 한해의 더께를 술로 씻어내려는 사람들의 갖가지 행태 또한 말썽이 되고 있다. 좀더 차분하게 해를 보내는 지혜를 새삼 생각해볼 때다. 올해부터 급속하게 나빠진 경제의 어려움은 해가 바뀌어도 별반 좋아질 것 같지 않다. 그렇다면 나라경영이건 가계(家計)건 이에 대비해 되도록 씀씀이를 줄이고 아껴쓰는 기풍을 키워야 할텐데 과연 그러고 있는가. 국회를 통과한 새해 예산은 올해보다 13%이상 늘었고 소득규모에 비해 소비를 늘려온 국민들도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 있다. 걱정스러운 건 연말연시(年末年始)의 마시고 쓰기 풍조가 불황은 아랑곳 없이 확산되지 않겠느냐는 점이다. 이런 우려는 최근 경찰의 음주운전 단속결과에서도 드러났다. 경찰이 미리 집중단속을 예고했는데도 두차례에 걸쳐 무려 3천여명이 적발됐다. 송년 분위기에 젖어 흠뻑 술에 취해 도저히 차를 몰 수 없는 상황인데도 운전대를 잡은 음주운전자는 1천3백여명이었다. 알코올 농도측정을 거부하거나 면허조차 없이 운전한 사람도 부지기수였고 일부는 『망년회에서 한잔한 것이 무슨 죄냐』며 단속경찰관에게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불황의 체감지수가 높아졌다지만 망년회에서 마구 술을 마시는 분위기는 여전하고 술 권하는 악습도 여전해 망신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경기가 나쁘고 일 또한 제대로 안풀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폭음과 그에 따른 비이성적 행동을 한 경우가 많았다. 경제적 불만과 아쉬움을 돈을 헤프게 써서 보상받고자하는 세밑음주끝의 운전은 후회만 남기고 잘못하면 나와 남의 목숨까지 앗아가는 참극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너무 쉽게 잊고 있는 것이다. 세밑의 검소하고 차분한 기풍이 실종되면 범죄의 창궐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 과소비에 빠져 무질서한 사회는 계층간 위화감을 조장, 강력범죄가 늘어나고 자연히 치안의 난맥을 불러온다. 한해를 마감하는 세밑무렵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범죄자들의 범행심리를 자극한 예는 수없이 많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차분하게 한해를 돌아보며 새해를 설계하는 것이야말로 나와 가족의 안전까지 보장하는 일임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당당히 맞서 헤쳐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단순히 술마셔 잊고 넘기는 망년(忘年)은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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