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침묵이 「최고 덕목」일 수 있다

  • 입력 1996년 12월 4일 20시 10분


『주한미군철수문제를 의제로 하지 않는다면 4자회담은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 지난 주말 평양방송이 한 시사논평의 한 대목이다. 앞서 9월초에도 외교부 대변인 성명은 『주한미군의 즉각철수논의에 관심이 없다면 이런 회담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한마디로 4자회담을 안하겠다는 말이다. ▼對北 강경정책의 파장▼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전력투구할 뿐 집요하게 남한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무장간첩사건에 대해서도 적반하장격으로 「천배 백배의 보복」을 가할터이니 미국은 이에 간여말라는 식의 한미간 이간질에 광분하고 있다.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노선이다. 북은 제네바 합의가 이행안되면, 다시 말해 경수로제공사업이 예정대로 진척되지 않으면 핵개발을 재개하겠다는 협박이다. 북의 벼랑끝 협박전술은 어느 정도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은 잠수함 침투사건에 대해 겉으로 한미공조체제를 강조하면서도 우리 정부의 강경태도를 무마하려 들고 심지어 『한반도 사태에 남한정부야말로 골치아픈 존재』라는 비난까지 흘리고 있다. 미국의 입장은 분명하다. 북을 어떻게 해서든지 끌어안고 달래면서 점진적으로 북의 체질을 개선시켜 개방 개혁에 연착륙시키자는 의도다. 가뜩이나 고립무원의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데 북을 자극하는 것은 평화 안정을 유도하는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수함사건 이후에도 북에 대한 자극적 발언을 삼가고 중유제공을 계속하고 있다. 크게 보아 미국의 북한 회유외교에 이의가 없다. 중국이나 일본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현상유지노선이라 할까,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깨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미국이 50년간 다져진 한미간 혈맹관계의 틀안에서 진행해야 할텐데 남과의 동맹관계를 희석시키면서 일방적으로 서두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인상이다. 우리 정부 입장은 크게 다르다. 『무장정찰부대 침투사건에 한마디 사과도 없는데 어떻게 우리 기술자 수백명을 북한땅에 보내 경수로를 건설할 수 있겠느냐』는 국민감정을 의식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관계가 심상치 않다. 물론 우리 외교의 미숙에도 문제가 있다. 우선 金泳三(김영삼)대통령의 대북정책수행에 불안해하는 국민이 많다. 무엇이 아쉬워 4자회담에 그토록 열을 올리는지 알 수 없다. 11월초 김대통령은 『북의 사과 없이는 4자회담도 경수로 제공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11월24일의 한미정상회담에서는 제네바합의의 계속 이행과 4자회담의 추진을 공약했다. 북한에 잠수함사건에 대해 「수락할 수 있는 조치」를 촉구했으나 제네바합의 이행이나 4자회담의 선행조건으로 삼지 않았다. 사흘후 김대통령은 북의 사과 없이는 경수로 지원은 없다고 잘라 말했고 『북한은 이미 붕괴단계에 들어가 얼마나 더 지탱할까는 시간문제』라고 말했다. 다시 강경책으로 선회한 셈이다. ▼「自制의 미학」 아쉬움▼ 적어도 미국입장에서 볼 때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물고기를 낚으려는데 한국이 물고기를 쫓아버린다』고 투덜거리는 미국 친구가 있다. 대북정책에 일관성이 있어야겠다. 책임있는 지도자일수록 말을 아껴야 하고 특히 최고지도자의 말이 가져올 파장을 섬세하게 저울질해야 한다. 때로는 침묵이 금이다. 침묵이야말로 최고의 덕목일 수 있다. 특히 대북관계에서 그런 것 같다. 그 대신 조용히 한미간 이견을 조율하는 것이 급선무이고 긴 안목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용기있는 후퇴도 고려할 수 있어야겠다. 박 권 상<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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