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9)

  • 입력 1996년 10월 29일 20시 28분


나에 대한 타당한 오해들〈6〉 불현듯 눈을 떠보니 현석과의 약속시간이 십분이나 지나 있다. 서둘러 가더라도 한시간은 늦을 것 같다. 토요일 대학로는 몹시 혼잡하다. 나는 약속시간에서 한시간 삼십분이 지나서야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 있었다. 현석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가 가버렸다고 해도 명백한 이유가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카페로 통하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간다. 현석은 릭텐스타인의 「물에 빠진 소녀」그림 아래 앉아 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로 그는 막 문안으로 들어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베이지색 카디건에 받쳐 입은 갈색 폴라셔츠가 그의 흰 얼굴 위에 희미한 우수의 빛을 던지고 있다. 그대로 나를 향해 고정된 그의 눈빛. 왼쪽 팔꿈치를 받치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서 입술로 가져가자, 그의 손끝에서 연기를 올리고 있던 담배가 다음 순간 빨갛게 타오른다. 내가 매혹된 표정을 짓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일부러 약간 수선스럽게 걸음을 뗀다. 현석의 맞은편에 가서 앉을 때도 털썩 주저앉는다. 『늦어버렸네요? 미안해요』 현석은 아무 말 없이 담배를 비벼 끈다. 재떨이에 꽁초가 수북하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내 물음은 깍듯하고 상냥하다. 현석은 피식 웃는다. 『어땠을 것 같아요?』 『글쎄요. 좋아 보이는데요』 『그런가요?』 몇 마디 인사를 주고 받자 우리는 도리어 서먹해진다. 서먹해진 김에 우리의 대화는 더욱 의례적이 된다. 이번 학기에는 강의가 몇 시간이냐, 보직은 맡지 않았느냐, 어머니 건강은 어떠시냐 하고 내가 물었고 그는 종합관에 있었던 한총련 학생들이 망을 보느라 인문관으로 들어와서 연구실 문을 다 부숴놓았다, 그래서 손잡이를 새로 해 달았다, 어머니는 퇴원을 해서 지금은 집에서 통원치료를 한다 등의 대답을 한다. 그러고나서는한동안침묵이우리사이를가로막는다. 현석이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 눈을 내리깐 채 잠긴 목소리로 말한다. 『오랜만이에요』 『……』 『그동안…』 그때 메뉴판을 옆구리에 낀 종업원이 마치 스파이를 색출하는 게슈타포처럼 다가와서 위압적으로 현석의 옆에 바짝 붙어선다. <글 :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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