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도 겁내던 물 공포증 아이, 물의 지배자로… 민병언 배영 50m 金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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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장애인으로 낳았어요 어머니께 따진 말 후회…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너 어디 다쳤니? 왜 그렇게 걸어?”

등굣길의 초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지나가던 아저씨가 물었다.

“안 다쳤는데요.”

대답은 했지만 아이는 궁금했다. 내 걸음이 그렇게 이상한가? 걸음마를 잘못 배웠나?

그때만 해도 친구들과 뛰어다니며 놀던 아이는 아저씨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게 장애의 시작이라는 것은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아이의 몸은 그때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10세 전후로 증상이 나타나 손발의 근육이 위축되고 그 형태가 변하는 희귀 질환 유전운동감각신경병(CMT·샤르코-마리-투스)이었다.

한국 장애인 수영의 간판스타 민병언(27·나사렛대)이 9일(한국 시간) 런던 올림픽파크 아쿠아틱스센터에서 열린 2012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수영 남자 배영 50m(S3·지체장애) 결선에서 42초 51로 우승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기록에는 0.3초 못 미쳤지만 2위를 3초75 차로 제친 압도적인 레이스였다.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 그를 0.49초 차로 제치고 우승했던 중국의 두젠핑은 46초48로 3위에 그쳤다. 당시 두젠핑은 전력 노출을 막기 위해 예선에서는 한 팔로만 수영을 했고 결선에서 두 팔을 모두 사용해 민병언을 당황하게 했다. 이로써 ‘울보’ 조순영 감독(35)이 이끄는 대표팀은 임우근(S5·지체장애·평영 100m)이 24년 만에 금메달을 딴 데 이어 민병언까지 정상에 오르면서 런던 패럴림픽을 역대 최고의 성적으로 장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민병언은 다리 힘을 쓸 수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휠체어를 사용해야 했다. 어머니 김경자 씨(51)는 병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 초등학생이던 아들에게 수영을 시켜보려 했지만 이내 그만둬야 했다. 민병언은 물을 무서워했다. 수질을 유지하기 위해 물을 공급할 때 나오는 기계음이 두려웠다. 심할 때는 세수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가족끼리 바닷가에 놀러 가면 구명조끼에 튜브까지 끼고도 불안했어요. 고교를 졸업한 뒤 어머니가 ‘다 커서도 그러면 창피하지 않느냐’며 수영 개인 교습을 시켜 주셨죠.”

성인이 된 민병언은 물에 대한 공포와 정면으로 맞섰다. ‘나는 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자유형을 익혔고 곧 배영도 능숙하게 했다. 2개월 만에 접영까지 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선생님이 너무 잘 가르쳐 주신다’라고만 생각했다. 타고난 재능 덕에 실력은 쑥쑥 늘었다. 수영을 시작한 지 2년 뒤인 2006년 3월에는 경험 삼아 출전한 국내 대회에서 자유형 50m와 배영 50m를 석권했다.

“물 밖과 달리 물속은 내 세상이었어요. 불편한 몸을 한결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죠.”

어머니는 아들이 제 세상을 만난 게 기뻤다. 아들의 극구 만류에도 대회 장소가 어디든 혼자 차를 몰고 가 아들을 응원하고 뒷바라지했다. 어머니의 헌신 속에 태극마크를 달게 된 민병언은 2008 베이징 패럴림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자유형 50m)을 땄고 4년 뒤 런던에서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어머니는 민병언이 어렸을 때부터 워낙 착하고 순해 야단맞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아들은 어머니에게 크게 잘못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중학교 때인가 원망스러운 마음에 ‘왜 나를 장애인으로 낳았느냐’고 말한 적이 있어요. 어머니는 별말씀 안 하셨는데 아마 가슴으로 우셨을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참 나쁜 자식이었죠. 지금은 달라요. 제게 장애가 없었다면 이런 기쁨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어머니, 저를 이렇게 낳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런던=이승건 기자 why@donga.com
#민병언#남자 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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