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롯데 공필성 코치, 공격도 수비도 몸으로…몸야구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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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월 17일 07시 00분


맞고서라도 출루!…사구로 방망이 커버
총알같은 3루 타구 몸으로 막은후 송구

손가락 부러져 철심 박고 후반기 완주도
불굴의 악바리 근성 ‘갈매기 정신’ 추앙

롯데 공필성 코치(오른쪽)는 선수시절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도자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롯데 공필성 코치(오른쪽)는 선수시절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지도자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롯데의 2012시즌 코치진 구성을 보면 정확히 20년 전인 1992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들이 곳곳에 포진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에도 코치였던 권두조가 수석코치로 컴백했고, 박정태가 타격코치, 가득염 박계원 윤형배 염종석 등이 가세했다. 그리고 공필성 2군 수비코치가 있다.

수많은 롯데의 별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박정태의 16번과 공필성의 0번은 부산팬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아마도 박정태와 공필성, 그 둘에서 부산팬들은 ‘롯데 정신’을 느끼기 때문 아닐까. 기록으로 따지면 평범함 이하의 선수였던 공필성은 스스로의 표현을 빌리면 “기록이 아닌 기억으로 남는 선수”였다.

○“어깨 믿고 야구”


공필성은 원래 핸드볼을 했다. 어릴 적부터 어깨 하나는 자신 있었다. 경성대 2학년 때 잠깐 3루수를 했던 것을 제외하면 아마 시절 거의 유격수였다. 3루와 유격수가 동시에 가능해서 어디를 가든 바로 주전이었다.

그러나 3루가 더 편했다. 왜냐하면 3루라는 자리는 기본기가 떨어져도 타구를 몸으로라도 막아내 땅에 떨어뜨린 뒤 강한 어깨로 정확하게 송구하면 됐기에 공필성의 적성에 맞았다. 야구에 뒤늦게 입문한 까닭에 공필성의 콤플렉스는 기본기였는데 3루는 그런 한계를 정신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장소였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깡다구 하나는 세니까요. 아무리 강한 타구가 날아와도 몸으로 들이대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반사 신경을 몸이 공쪽으로 향하도록 만들어놓는 거니까요. 나는요, 그게 수월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고 공을 피했다면 용납이 안 됐어요.”

○“1992년 나의 소원 3가지가 이루어졌다”

1990년 1차 2순위로 연고구단 롯데에 입단했다. 입단하니 유격수에 오대석, 3루에 한영준 같은 대선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와중에 1992시즌을 앞두고, 박계원이 신인 유격수로 입단했다. 거물급 신인이 들어오자 당시 강병철 롯데 감독은 공필성의 3루수 기용을 결심했다. 첫 번째 꿈인 주전 확보에 이어 타격도 프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1991시즌을 마치고 마무리 캠프에서 일본인 인스트럭터가 한발을 들고 치는 타법을 권했는데 이것이 효험을 발휘했다. 그리고 1992년 롯데는 3위로 정규시즌을 마친 뒤, 여세를 몰아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해냈다. 이 우승은 20년이 흐른 현재까지 롯데의 마지막 우승이다.
롯데 공필성 코치. 사진제공ㅣ롯데자이언츠
롯데 공필성 코치. 사진제공ㅣ롯데자이언츠

○“손가락 부러지고도 숨기고 뛰었다”

박정태는 현역 시절 집에서 자다가 연탄가스를 마시고도 일어나서 당일 경기를 뛰었다. 이런 ‘전설’이 공필성에게도 있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얘기인데 내 오른쪽 손가락 약지는 부러진 상태입니다. 철심 두 개를 박았어요. 올스타 브레이크 때 집에서 쉬고 있는데 도둑이 들어온 거죠. 그 도둑을 잡으려다 손가락이 부러졌는데 트레이너한테만 얘기했어요. ‘던지는 데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 치는 것만 좀 부자연스러운데 괜찮을 것 같으니 (트레이너) 형님하고 나하고만 압시다.”

그렇게 후반기를 다 뛰었다. 시즌을 끝내고 병원을 찾아가니 철심이 휘어져서 안 빠졌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공 선수, 참 무식하다. 굉장히 아팠을 텐데….”

가뜩이나 타고난 재주도 없는 데 손가락까지 성치 않으니 방망이가 안 됐다.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했다. 다른 사람한테 자기 자리를 내주기는 싫었으니까. 이때부터 ‘사구왕’ 공필성의 이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몸에 맞다보니까 요령이 생겨요. 처음에는 직구는 정말 못 맞겠더라고. 그런데 나중에는 직구도 편안하게 맞아.(웃음)”

○“장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공필성은 본인도 인정하듯 기록은 ‘평범 이하’다. 3할을 친 시즌도 없고, 두 자릿수 홈런기록도 단 한 시즌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파울제조기’라는 애칭이 붙을 정도로 커트로 상대투수를 괴롭히는 면모가 있었다.

“홈런도 못 치지. 안타도 못 치지. 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근성뿐이었어요. 살아나가려고 하는 끈질긴 면이요. 지금도 후배들한테 말해요. ‘재능이 없어도 성공할 수 있다. 너희도 모르는 장점을 찾아내자. 이대호 양준혁 이승엽 같은 레전드가 있지만 사람들은 나도 기억한다. 살길을 찾았기 때문이다.’”

○“0번으로 성공한 선수는 나뿐이다”

돌이켜보면 공필성은 ‘머니볼’ 형 선수의 원조격일 수 있다. “내 기록상으로 그나마 나은 것이 출루율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를 못 치더라도 살아나가는 것을 컨셉트로 잡았거든요.” 커트, 사구, 출루율 그리고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연속경기 출장을 탐내던 그 근성이 공필성의 에센스였다.

이런 공필성은 0이라는 백넘버로 팬들의 기억에 회자된다. “처음에는 구단에서 준 43번을 달았어요. 그런데 너무 맘에 안 들어. 3년째 도저히 안 돼서 바꾸기로 했는데 0번이 보이더라고.” 당시로서 튀는 행동인지라 강 감독은 그의 뒷통수를 치더니 “야구나 잘 하고 0번 달지”하고 핀잔을 줬다. 그러나 공필성은 기죽지 않고 “감독님, 저 야구 잘할 겁니다”라고 바로 받아치고 기어코 0번을 달았다. 공필성은 “0번 달고 성공한 롯데선수는 나 이외에 아직 없어”라고 웃었다.

공필성 코치?

▲생년월일=1967년 10월 10일
▲출신교=제황초∼진해남중∼마산상고∼경성대
▲키·몸무게=178cm·74kg(우투우타)
▲프로 경력=1990년 1차 2순위로 롯데 입단∼2002년 롯데 코치
▲프로 통산 성적=1184경기 3061타수 760안타(타율 0.248) 41홈런 346타점 94사구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트위터@matsri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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