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감독들 수난시대, 이기는 건 기본이고 화끈한 승부로 구단-팬 비위까지 맞춰야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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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모른 로이스터, 행복했을 것”

김재박 감독은 현대 시절 4차례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다. 그는 무사에 주자가 나가기만 하면 번트를 지시했다. “왜 그렇게 재미없는 야구를 하느냐”고 누가 물으면 명쾌하게 답했다. “관중은 이기는 경기를 보러 온다. 지면 나도 잘린다.” 2007년 LG 사령탑으로 부임한 뒤엔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더 많았다. 결국 2009시즌 뒤 재계약에 실패했다.

몇 년 안 된 얘기지만 돌이켜 보면 감독들에게는 그때가 참 좋은 시절이었다. 당시에도 감독들은 “우린 파리 목숨”이라고 자조하긴 했다. 그래도 성적만 좋으면 잘릴 걱정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야구 인기가 높아지면서 구단에 돈을 대는 그룹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기는 건 기본이다. 그런데 그냥 이기기만 해선 안 된다. 깨끗하게, 화끈하게, 팬들이 즐겁게 이겨야 한다.

지난 시즌 후 조짐이 나타났다. 선동열 감독이 이끈 삼성은 우승권 전력이 아닌데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에서 SK에 힘 한 번 못 써보고 4전 전패한 게 문제였다. 형식은 자진 사퇴였지만 선 감독은 한 방에 날아갔다. 선 감독이 누군가. 선수 시절 국보 투수였고, 삼성에 우승컵을 2번이나 안기며 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하던 사람이었다. 계약 기간은 4년이나 남아 있었지만 구단은 개의치 않았다.

18일 SK에서 전격 경질된 ‘야신(野神)’ 김성근 감독도 마찬가지다. 성적으로만 보면 그만한 사람이 없다. 한 번도 우승 못 해 본 팀에 지난 4년간 3번이나 우승컵을 안겼다. 그렇지만 구단은 우승 이상을 기대했다. 이기되 안티 팬을 만들지 않아야 했고, 우승하되 그룹 이미지에 도움이 돼야 했다. 겉으로는 재계약을 둘러싼 갈등 끝에 물러난 모양새였지만 김 감독과 프런트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었다.

팬들의 열기도 무시할 수 없다. 4강 다툼 중인 LG 박종훈 감독은 18일 두산전에서 패한 뒤 중앙 출입구를 막아선 팬들 앞에서 확성기를 들고 공개 사과를 해야 했다. 롯데 양승호 감독은 일부 팬들의 계속되는 협박에 휴대전화 번호도 바꿨다. 또 다른 명장 김경문 전 두산 감독은 성적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6월 스스로 지휘봉을 내려놨다.

한 야구 관계자는 “아마 한국에서 가장 행복했던 감독은 지난 3년간 롯데를 맡았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일 것”이라고 했다. “로이스터 감독은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어쨌건 김성근 감독을 마지막으로 지난해 한국 프로야구 4강 감독은 모두 현장을 떠났다. 살벌하고 무서운 바닥이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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