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추성훈’ 리 다다나리의 얄궂은 운명

  • Array
  • 입력 2010년 12월 27일 03시 00분


코멘트

난 재일교포 4세 축구선수다… 꿈이었던 태극마크도 달았다… 하지만 조국서 돌아온 건 편견의 상처뿐… 난 이제 일장기를 달고 아시안컵을 뛴다… 그리고…

얄궂은 운명이다. 한국 축구국가대표를 꿈꾸다 좌절된 재일교포 이충성(왼쪽)이 최근 카타르 아시안컵 축구대회 일본 대표팀에 선발됐다.‘영원한 라이벌’ 일본의 국기를 달고 조국에 ‘총’을 겨누게 됐다. 사진은 J리그에서 뛰는 이충성.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얄궂은 운명이다. 한국 축구국가대표를 꿈꾸다 좌절된 재일교포 이충성(왼쪽)이 최근 카타르 아시안컵 축구대회 일본 대표팀에 선발됐다.‘영원한 라이벌’ 일본의 국기를 달고 조국에 ‘총’을 겨누게 됐다. 사진은 J리그에서 뛰는 이충성. 사진 제공 아사히신문
‘재일동포인 나는 태극마크를 꿈꿨다. 한국 국적과 이름을 고수했다. 대표팀에 들어가기 위해 내 고향 한국으로 왔다. 날 기다린 건 일본에서보다 무서운 차별과 멸시. 결국 일본으로 돌아가 국적을 바꿨다. 일장기를 달고 대표팀에 들어갔다. 한국인들은 조국에 등을 돌렸다며 날 비난했다. 하지만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한국 유도대표팀을 꿈꾸다 결국 일장기를 달고 아시아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추성훈(35). 이런 비극이 그의 전유물은 아니다.

최근 카타르 아시안컵 축구대회를 앞두고 일본 대표팀에 뽑힌 이충성(25·산프레체 히로시마)도 전형적인 ‘제2의 추성훈’이다. 올 시즌 일본 프로축구 J리그에서 30경기에서 11골을 터뜨리며 무서운 득점력을 선보여 이탈리아 출신 알베르토 차케로니 감독의 낙점을 받은 그는 추성훈과 마찬가지로 재일교포 4세다. 한국 대표팀을 꿈꿨던 것도 똑같다.

1985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이충성은 총련계인 도쿄 조선 제9초급학교에 입학해 축구를 시작했다.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 크기 위해 조선학교가 아닌 일본계 중학교로 진학했다.

이곳에서 그는 ‘조센진’으로 차별받았다. 빈 공간에 있어도 그에게 패스는 잘 오지 않았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FC 도쿄 18세 이하 유소년팀에 입단해 실력을 인정받았다. 2004년 1군으로 올라간 이충성은 당시 일본에서 뛰던 오장은(울산)의 추천으로 한국 18세 이하 대표팀에 선발됐다.

“내 꿈은 한국 국가대표”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극마크를 단 순간이다. 꿈에도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어눌한 말투와 일본인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팀 동료들은 이상하게 바라봤다. 일부는 재일교포를 비하하는 “반×××”로 불렀다. 자신의 고향인 한국에서 그런 차별을 당한 그는 결국 상처만 안고 2005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뒤 한국 대표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재일교포 선수로 J리그에서 활약하다 2007년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귀화했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돼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다.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는 서지 못했지만 다음 달 7일 개막하는 아시안컵 대표팀에 승선하면서 대표팀의 꿈을 이루게 됐다.

일본으로 귀화를 했지만 한국을 버린 것은 아니다. 그의 일본 이름은 리 다다나리. 그는 오야마(大山)라는 일본식 이름이 있었지만 일본에서 성으로 잘 쓰지 않는 이(李)를 고수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일본명으로 불리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이충성으로 부른다. 소속팀 유니폼에 적힌 이름은 다다나리(TADANARI)가 아닌 충성(CHUNSON)이다. 그가 얼마나 한국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은 아시안컵 조별리그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요르단, 시리아와 함께 B조에 속했다. C조 한국과는 준결승 이후 만날 수 있다. 이충성으로선 일장기를 달고 조국과 맞붙는 얄궂은 운명도 가능하다.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