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채의 사커에세이] 남아공 월드컵 추억을 팔아라!

  • 스포츠동아
  • 입력 2010년 5월 11일 07시 00분


3년 전 국내에서 국제축구연맹(FIFA) 청소년(17세 이하) 월드컵이 열렸을 때 일이다.

조별 리그를 통과한 북한이 울산에서 우승후보 스페인과 16강전을 치르게 됐다. 경기 시작 전, 필자는 사진기자들이 송고한 현장사진을 웹사이트에 올리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관중석에 걸려있던 대형 한반도기를 찍은 사진도 있었다. 별 생각 없이 그 사진을 게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팀장에게 연락이 왔다.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은 사진을 실을 수 없으니 당장 내리라는 지시였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어려서부터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은 단일 민족 국가’라든지 ‘우리의 소원은 통일’같은 슬로건을 자연스럽게 접해 왔기 때문에 한반도기가 문제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FIFA의 경기 규칙은 어떠한 정치적, 종교적 혹은 개인적인 의사 표현을 금지하고 있지만 그걸 선수가 아닌 관중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는 건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건 내가 판단할 수 없는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것은 모든 국제기구의 기본적인 의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축구를 통한 화합과 친선을 첫 번째 목표로 규정하고 있는 FIFA는 경기 외적인 부분이 경기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사전에 방지할 책임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민족, 문화, 언어가 섞여 있는 ‘무지개 국가’ 남아공에서 열리는 이번 월드컵을 잘 치르는 것은 FIFA와 대회 조직위원회에겐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돌이켜 보면 최근 열렸던 월드컵들은 그런 도전의 연속이었다. 다른 형태의 축구가 국기로 자리 잡은 미국에서 열린 94년 대회부터, ‘다민족 대표팀’프랑스가 우승을 차지한 98년 대회, 숙적 한국과 일본이 개최국의 이점을 살린 2002년 대회, 그리고 통일 독일이 처음으로 주최한 2006년 대회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모두 성공적인 월드컵으로 평가받았다.

사실 국경이나 민족이란 개념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현대 사회에서 월드컵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국가주의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지나친 상업화로 비판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은 여전히 지구촌 최대의 축제이자 각국 대표팀간 축구 전쟁이다. 선수들은 싸우고, 팬들은 즐기고, 기업들은 돈을 댄다. 이런 균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파티를 계획하고 주관하는 게 ‘페어플레이’를 강조하는 FIFA의 역할이다.

표면적으로는 이 파티의 주인공은 32개국 대표팀 선수들이다. 그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그들의 비중이 조금씩 줄고 있다는 점이다. 펠레와 마라도나가 풍미했던 슈퍼스타의 시대가 저물고 조직력과 수비가 강한 팀들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축구계의 세력 지도가 바뀌고 있다. 2002년에는 유럽과 남미의 강호들이 줄줄이 탈락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팀들이 주목을 받았고, 2006년에는 큰 이변이 없었지만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해트트릭이 사라지는 등 더 이상 ‘원맨쇼’를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팬들의 영역은 오히려 넓어졌다. 2002년 대회 당시 거리를 메웠던 수백만의 ‘붉은 악마’는 한국 뿐 만 아니라 전세계 축구팬들을 놀라게 했고, 이를 눈여겨봤던 2006년 독일 대회조직위는 아예 ‘팬 페스트’란 이름 아래 단체응원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개최 도시마다 마련하기도 했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서로를 껴안고 어깨동무를 하는가 하면, 냉소적인 팬들도 자국 대표팀이 골을 넣으면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이번 대회에서는 초반 입장권 판매율이 저조하지만 조직위는 앞으로 개막까지 남은 한 달 동안 나머지 표가 모두 팔릴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성공적인 월드컵의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려운 조에 속한 개최국이 얼마나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지, 외국인 관광객들을 얼마나 많이 유치해 흑자를 낼 수 있을지, 혹은 입장권을 얼마나 팔아서 환상적인 경기장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가 8년 전에 그랬듯 전 세계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FIFA.COM 에디터
2002 월드컵 때 서울월드컵 경기장 관중안내를 맡으면서 시작된 축구와의 인연. 이후 인터넷에서 축구기사를 쓰며 축구를 종교처럼 믿고 있다.국제축구의 흐름을 꿰뚫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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