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 오전 10시에서 30분쯤 지났을까. 허정무 월드컵 대표팀 감독(사진)이 대한축구협회 사무실로 들어섰다. 늦잠을 잤다고 했다. 요즘 국내외 경기를 보다 보면 밤낮이 바뀔 때가 많다는 것.
“하는 거 없이 보여도 하루하루가 그렇게 빨리 갈 수가 없어요. 마음도 좀 초조하죠. 시간은 빨리 가는데 우리가 뭔가 하고 있는 게 가시적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본선 걱정 하다 보면 하루 금방 가요.”
선수들 경기를 보며 전화로 코치도 해준다고 했다.
“통화하면서 (박지성에게) 축하한다고 얘기했고요. ‘월드컵에 뛸 수 있는 힘은 조금 남겨 놓아라’라고 농담도 했어요.”
온 국민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을 물어봤다. 정말로 우리가 ‘첫 원정 16강’에 갈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는 게 정답이에요. 예측은 벗어나는 경우가 많잖아요. 예측대로라면 16강 진출은 너무 힘들죠.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반드시 해내겠다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는 걸, 국민들이 아셨으면 좋겠어요.”
그렇다면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본 평가전은 어느 경기였을까.
“한 경기 갖고 얘기하는 건 의미가 없고, 우리 선수들이 매일 발전하고 있다는 거죠. 세대교체가 되면서 기존 선수들에게도 자극이 되고….”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가끔 여론의 조급함이 아쉬운 듯. 2월 동아시아선수권 중국전에서 졌을 때를 회상했다.
“진 것은 진 거지만 여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 전에 저도 당해봤기 때문에. 수비가 나쁘다고 얘기하는데 수비가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 뒤에 좋은 모습 보여줬고….”
7년 만에 대표팀 사령탑으로 돌아온 2007년. 초반에 무승부가 이어지자 ‘허무축구’라는 비판이 일었다.
“못하면 비판 받아야죠. 하지만 저에겐 월드컵 무대라는 목표가 있었고, 그러려면 세대교체가 필요했어요. 외국인 감독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들은 전혀 거기에 신경 안 썼단 말이에요. 순간 부진한 것 감수하고 큰 목표, 미래로 가야죠.” 선수-코칭스태프로 참가한 지난 세번 월드컵 땐 위축 이번엔 나도 즐기고 싶어
그가 발탁한 기성용 이청용 등 젊은 선수들은 대표팀의 기둥으로 성장했다. 허 감독은 다행이라며 “결과가 안 좋았다면 모든 화살은 나에게 돌아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성 이영표를 발탁했을 때도 욕을 먹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 얘기는 안 한다”고도 했다.
결전을 앞둔 요즘의 심정은 어떨까. “인터넷 댓글 안 보고 저녁 술자리 모임도 안 가요. 그저 지금은 귀 막고 갈 길만 간다는 생각뿐이죠.”
이번 월드컵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허 감독과 아르헨티나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50)과의 재회. 허 감독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라도나 감독을 밀착 마크하다가 ‘태권 축구’라는 별칭을 얻었다.
“사실 공 따라 가는 거였는데, 사진에 공은 안 나와서 (꼭 차는 것처럼) 보이게 됐어요. 공교롭게도 월드컵 무대에서 붙게 됐는데, 우리 선수들이 무력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선수(1986년 멕시코), 트레이너(1990년 이탈리아), 코치(1994년 미국)로 뛰었던 지난 세 번의 월드컵에 아쉬움이 많은 듯했다.
“저도 이번엔 즐기고 싶어요. 선수 땐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위축된 플레이를 하고 후회가 남았죠. 트레이너, 코치 때도 그랬어요. 우리 선수들에게도 얘기했어요. ‘책임은 내가 진다. 너희들은 나처럼 후회만 하는 사람 되지 말고,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최선 다했다면 최고로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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