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골프]골프 대디 ‘그린 뒤의 슈퍼맨’

  • 입력 2009년 8월 29일 02시 59분


지난해 메이저 골프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박인비(오른쪽)의 ‘골프 대디’ 박건규 씨. 지난 주말 딸이 제주 서귀포시 더 클래식CC에서 열린 넵스 마스터피스 출전차 귀국하자 2, 3라운드에서 캐디백을 멨다. 박인비는 연장 접전 끝에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사진 제공 JNA
지난해 메이저 골프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박인비(오른쪽)의 ‘골프 대디’ 박건규 씨. 지난 주말 딸이 제주 서귀포시 더 클래식CC에서 열린 넵스 마스터피스 출전차 귀국하자 2, 3라운드에서 캐디백을 멨다. 박인비는 연장 접전 끝에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사진 제공 JNA
캐디로… 운전사로… 매니저로
■박인비 부녀 통해 본 애환

지난해 여자 메이저 골프대회인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박인비(21·SK텔레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뛰고 있는 그는 지난 주말 잠시 국내 무대에 복귀해 제주 서귀포시 더클래식CC(파72)에서 열린 넵스 마스터피스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2, 3라운드에선 아버지 박건규 씨(48)가 캐디로 나섰다.

아버지가 캐디백을 멘 것은 2007년 이후 2년 반 만에 처음이었다. 전담 캐디가 휴가를 떠나 1라운드에는 골프장에 소속된 하우스 캐디를 썼으나 호흡이 잘 맞지 않아 아버지가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아빠 캐디’의 효과 때문인지 박인비는 2라운드에 8언더파를 몰아쳤다. 최종 3라운드에서도 연장 두 번째 홀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이 부녀에게는 연장 첫 번째 홀이 두고두고 아쉬울 만했다. 18번홀(파4)에서 박인비는 1m 좀 넘는 내리막 슬라이스 라인의 버디 퍼트를 남겨 뒀다. 이 퍼트를 넣으면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박인비가 “아빠, 왼쪽 끝을 보고 공을 살짝 태울게요”라고 말하자 박 씨는 “똑바로 자신 있게 쳐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공은 너무 강하게 굴렀고 홀을 맞고 꺾여 나왔다. 아버지와 딸의 얼굴에는 안타까움과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틀 동안 땡볕 속에서 20kg 가까운 캐디백을 메고 걷느라 얼굴이 새까맣게 탄 박 씨는 “인비가 아빠 말을 너무 잘 들어 퍼트가 빠진 것 같다. 그래도 좋은 추억이 됐다”며 웃었다.

구력 20년에 베스트 스코어가 69타인 박 씨는 경기 안산시에 있는 용기 포장재 제조업체 유래코의 대표이사다. 건실한 중소기업을 이끌고 있는 그는 2001년 부인과 두 딸을 미국으로 떠나보낸 뒤 8년째 기러기 생활을 하고 있다. 박인비가 LPGA 2부 투어에서 뛸 때인 2006년에는 회사 경영을 잠시 친구에게 맡긴 채 미국으로 건너가 5개월 동안 캐디, 운전사, 매니저, 요리사 등 1인 다역으로 딸의 뒷바라지를 했다. “미국의 2부 투어 대회는 주로 외진 시골에서만 하거든요. 24시간 동안 운전을 한 적도 있죠. 경비 부담 때문에 싸구려 호텔에 묵으며 밥도 해 먹이고…. 생선이나 고기를 굽다 연기 때문에 소방차가 세 번이나 출동했어요. 고생 끝에 이듬해 1부 투어에 와보니 천국이 따로 없더군요.”

박 씨가 자녀를 미국으로 보낸 계기는 공부는 멀리한 채 오로지 운동만 시키는 국내 학원 스포츠의 현실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로 꼭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미국에서는 철저하게 수업을 다 받은 뒤 운동을 하게 하거든요. 어린 선수들의 장래를 위해선 개선이 시급할 것 같습니다.”

박인비와 아내의 출국으로 다시 ‘기러기’가 된 박 씨는 “저를 포함해 미국에 진출한 한국 골퍼를 둔 골프 대디들은 참 대단하다. 직장 포기하고 집을 팔거나 전세를 월세로 바꿔가며 딸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고생을 아이들이 제대로 알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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