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비박’ 체험기

  • 입력 2009년 7월 29일 20시 46분


북한산 해운대 암벽에 포타렛지를 설치한 뒤 걸터앉자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빗속에서 허공에 매달린 채 끓여먹은 라면 맛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사진 제공 이정식 photo9.co.kr
북한산 해운대 암벽에 포타렛지를 설치한 뒤 걸터앉자 서울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부슬부슬 내리는 안개빗속에서 허공에 매달린 채 끓여먹은 라면 맛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사진 제공 이정식 photo9.co.kr
해발 836m의 북한산 백운대. 정상을 감싸고 있던 먹구름이 점점 짙어진다 싶더니 하필 등반이 시작되자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분무기로 뿌리듯 가늘던 빗방울은 앞서가던 정승권 씨가 곰바위에 올라섰을 때 겉옷이 젖어들 정도로 굵어졌다. 헬멧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빗물이 얼굴을 타고 목덜미로 흘러들어가 소름이 돋았다.

'내려가야 하나?' 피톤(로프를 걸기 위해 바위에 박아 넣은 금속 고리)에 안전벨트를 연결한 뒤 우리는 한동안 발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비에 젖은 숲에는 빠르게 어둠이 스며들었다. 날이 저물며 다행히 비는 잦아들었다.

"시작하지?" 오랜 등반 경험으로 날씨 변화를 꿰뚫는 정 선배는 포타렛지를 설치하기 위해 하강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헤드랜턴을 켜야 했다. 포타렛지는 오르는 데 며칠씩 걸리는 거대 암벽에서 등반 중 잠을 자기 위해 고안된 휴대용 침대. 절벽에 매달 수 있게끔 고안된 이 특수 장비는 '휴대할 수 있는(Portable) 선반(Ledge)'의 합성어로 초기 모델의 상품명이 그대로 보통명사로 굳어진 경우다.

어둠 속에서 수직의 바위에 매달려 포타렛지를 조립하고 설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나 정 선배는 5분여 만에 뚝딱 설치를 끝내고 내게 내려오라며 손짓한다. 자신의 이름을 딴 정승권등산학교의 교장인 정선배는 1988년 대한산악연맹의 에베레스트 원정 때 정상을 밟은 이후 고산 등반보다 암벽 등반에 집중해온 '클라이밍 머신'이다. 트랑고, 아콩카과, 엘캐피탄, 하프돔 등 거대 암벽을 두루 거쳤다.

국내 암벽은 길이가 짧아 하루에 오르내릴 수 있기 때문에 거벽 등반을 겨냥한 훈련이 아니라면 포타렛지를 사용할 일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궂은 날씨 속에 북한산의 그다지 크지 않은 바위에 매달려 포타렛지 비박(飛泊)을 감행한 것은 9년 전 약속 때문이었다. 지난 2000년 나는 정선배와 엘캐피탄의 레티센트월 원정 등반을 함께 했으나 3피치째에서 휴가기간이 만료되는 바람에 후퇴해 아쉬움 속에 혼자 귀국해야 했다. 당시 정 선배는 후배 이민호 씨와 8일 동안 바위에서 먹고 자며 등반을 계속해 결국 성공했다.

뜨거운 캘리포니아의 바위벽에서 헤어질 때 정 선배는 낙담한 내게 "한국에 가서 포타렛지 비박 한 번 하자"고 했다. 내가 거벽의 포타렛지 야영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오늘에야 9년 전 엘캐피탄에서 쓰던 바로 그 포타렛지에 웅크리고 앉았다.

포타렛지는 처마 밑 제비집과 흡사하다. 2인용이라도 두 명이 편안히 눕기엔 옹색했지만 엘캐피탄의 추억을 화제 삼아 하룻밤을 보내기엔 충분했다. 발밑이 허공인 포타렛지에선 모든 걸 매달아둬야 한다. 매달린 버너와 매달린 코펠에 라면을 끓여 흩날리는 안개비 속에 빛나는 우이동, 상계동, 쌍문동의 야경을 바라보며 젓가락질을 했다. 따끈한 라면 국물이 들어가자 비에 젖어 식은 몸에 온기가 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균형이 깨져 포타렛지가 흔들렸기 때문에 라면을 먹고 차를 끓여 마시는 일은 기류 변화에 흔들리는 비행기의 이코노미 좌석에서 조심스럽게 기내식을 먹는 것과 같았다.

밤 10시께 구름이 걷혀 별이 보였다. 남동풍이 불어 축축해진 옷은 고슬고슬 말랐다. 우린 몽환의 바위벽에 매달려 별과 야경을 번갈아 바라보며 쉬 잠들지 못했다.

글=익스트림스포츠 칼럼니스트 송철웅 blog.naver.com/timber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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