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 골프]“고객을 흥분시킬 수 있는 퍼터 만들려 최선”

  • 입력 2009년 5월 23일 02시 59분


퍼터의 장인 스코티 캐머런 씨
“고객을 흥분시킬 수 있는 퍼터 제대로 만들려 최선 다했을 뿐”

악수하러 내민 손을 보니 곱상한 얼굴과 달리 흉터로 가득했다. 오히려 그는 흉터를 영광의 훈장처럼 여기는 듯 자랑스러워했다. “쇠를 갈고 절단하다 수없이 다친 덕에 최고의 퍼터를 만든다. 다섯 살짜리 딸은 아빠가 요즘도 철공소에서 일하는 줄 안다.”

퍼터의 장인으로 불리는 스코티 캐머런 씨(47·미국). 한국 팬과의 만남을 위해 처음으로 방한한 그를 21일 출국에 앞서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났다. 그의 퍼터는 미국프로골프투어에서 2006년 우승자 중 50%가 사용했다.

20년 가까이 퍼터의 정상을 지키는 비결이 궁금했다. 그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투어 프로가 원하는 제품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의 명함은 특이하다. 뒷면을 메모 공간으로 비워뒀다. 그는 이 명함을 들고 수시로 대회 현장을 찾아서 선수들을 만나 퍼터와 관련된 의견을 나눠 제작에 반영했다. 선수들의 신체 특성에 심지어 시선의 방향, 각도까지 고려했다. 선수들도 자주 스튜디오라고 불리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이런 발품에 따른 맞춤 퍼터는 투어 프로에게 인기가 높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나이키와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계약을 했지만 퍼터만은 그의 제품을 쓰고 있다.

1남 2녀의 막내로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한 그가 골프에 매달리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중고 퍼시먼 우드를 새롭게 만드는 게 취미였던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클럽 제작을 익혔다. 캐머런 씨가 13세 되던 해 세상을 뜬 아버지는 아들에게 “골프에 전념하면 미래가 보일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영향으로 골프와 야구 선수를 겸하던 그는 투어 골퍼에 도전했지만 성공 가능성이 작다는 현실에 부닥친 뒤 포기했다.

대신 골프 클럽 업체에 취직한 뒤 24세 때 집 차고에서 퍼터 디자인을 시작했다. 1992년 8000달러를 대출받아 화장실도 없는 사무실에서 ‘캐머런 골프’라는 업체를 창업했다. 그는 아내에게 “오늘 저녁 메뉴는 수프뿐”이라는 얘기를 들을 만큼 곤궁했다. 당시 80달러 안팎이던 퍼터의 가격을 300달러로 책정했을 때는 “미쳤다. 곧 망할 것”이란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93년 베른하르트 랑거가 그의 퍼터로 마스터스 우승을 하면서 뛰어난 성능과 디자인을 인정받았다. 그의 퍼터에 찍힌 독창적인 스탬프는 예술 작품처럼 수집가의 표적이 되며 수천만 원을 호가한다.

“공식 핸디캡은 1에 베스트 스코어는 67타다. 가끔 3퍼트도 한다”며 웃던 캐머런 씨는 “드라이버는 쇼고 퍼터는 돈이란 말은 틀림없다. 하루 종일 기계와 씨름하던 초심을 떠올리며 늘 고객을 흥분시킬 수 있는 퍼터를 내놓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dongA.com에 동영상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