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봉 눈밭 달리는 맛 ‘지상최고의 쾌감’

  • 입력 2009년 1월 22일 02시 55분


눈 두께 2.5m 울릉도 설원 국내 최초 스키 활강해보니

‘지난해 나리분지 현장 답사로 충분한 적설량을 확인했고, 올겨울 드디어 스키대회를 추진하게 됐다. 마침 포항∼울릉도에 500t급 여객선이 취항해 항해 시간이 15시간으로 크게 단축되는 등 여건이 많이 호전됐다.’

한국 스키 70년사 중 울릉도 스키대회 부분이다.

15시간의 뱃길을 ‘크게 단축됐다’고 표현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요즘엔 3시간 30분 남짓 걸린다.

정확히 60년 전인 1949년 1월 울릉도에서 제3회 전국스키대회가 열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적설량 국내 최고인 울릉도가 스키를 타기에 최적의 장소라는 사실도.

○ 야성 앞에 각종 장비 무용지물

16일부터 사흘간 열린 울릉도 산악스키 이벤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울릉도 스키의 맥을 되살린다는 묵직한 의미가 있었지만 나의 관심은 자연설 그대로인 성인봉에서 점프하는 익스트림 스키에 온통 쏠려 있었다.

저동항에서 봉래폭포와 말잔등을 거쳐 성인봉(984m)을 오른 뒤 나리분지 쪽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잡았다. 물론 올라가고 내려오는 데 모두 산악스키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 참신하고 새로운 시도는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야영지인 말잔등까지 가는 데만도 5시간 30분이 걸렸다.

2.5m에 이르는 엄청난 적설량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부실한 장비였다.

슬로프가 잘 정비된 스키장에선 별문제 없던 산악스키 장비들이 순도 100% 야생(野生)의 울릉도를 만나자 온갖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잡목에 걸려 스키 스톡의 바스켓이 빠지고 접착력이 충분치 않은 실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예비 실이 없는 대원들은 임시방편으로 테이프로 동여매야 했다.

○ 사활강-킥턴이 서바이벌 비결

날이 저물며 선두와 후미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생겼고 오후 3시에 출발한 사람들은 깜깜한 오후 8시 30분에야 녹초가 된 채 캠프에 도착했다.

이번 성인봉 프로젝트는 울릉군과 울릉산악회 외에 나리분지에서 말잔등까지 가는 군사용 케이블카를 보유한 군 당국의 도움을 받아 진행된 3자의 공동 작품이다.

올해로 2회째를 맞은 울릉도 눈꽃축제에 산악스키를 끼워 넣자는 울릉산악회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국내 최초로 성인봉 스키 등반-활강이 성사된 것이다.

그러나 ‘국내 최초’라는 말은 사실 외지인으로서만 최초일 뿐이다. 울릉산악회는 이미 7, 8년 전부터 산악스키를 꾸준히 해왔다.

“울릉도에서 스키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예요. 러셀로 올라왔으면 아마 7시간은 걸렸을걸요? 스키를 탈 줄 안다면 산악스키가 가장 효율적입니다.” 울릉산악회 구조대장 최희찬(41) 씨의 말이다.

이튿날 아침 캠핑 장비를 케이블카에 실어 내려보내고 말잔등에서 성인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으로 진입했다. 울릉도의 눈은 통상 2월에 가장 많이 내리지만 이미 내린 2.5m의 눈도 우리에겐 벅찼다.

1차 활강 코스는 성인봉에서 알봉을 향해 북서쪽으로 뻗어가다 섬백리향 군락지에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나리분지 중심으로 이어지는 4km 계곡.

계곡 초입은 고로쇠, 너도밤나무 사이로 고품질의 분설이 두껍게 깔려 있어 해외에서나 경험할 수 있었던 파우더 트리 런(powder tree run)을 만끽했다.

그러나 계곡은 잠시 후 화산섬 울릉도의 본색을 드러냈다. 거의 절벽에 가까운 경사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멋지게 턴을 이어가려던 꿈은 가파른 경사와 발목을 단단히 지탱해주지 못하는 산악스키 부츠 탓에 좌절됐다.

나는 스키강사 자격증 보유자이지만 울릉도의 야생은 애초에 그런 ‘계급장’ 따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활강 시작 3, 4분 만에 스키를 처음 신었던 초보자 신세로 돌아가고 말았다. 실력이 나보다 서너 수는 위인 박경이(대산련 산악스키위원회 총무) 씨도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울릉산악회 멤버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비결이 있긴 있었다. 완경사에선 턴을 이어가고 급경사에선 비스듬히 사활강을 하다 정지한 후 킥턴으로 방향을 바꿔 또다시 사활강. 그것은 야생에서의 서바이벌 스킹 기술이라고 할 만했다.

2시간 후 우리는 나리분지로 내려가 신령수 샘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3~4m 절벽 점프 땐 짜릿

2차 활강은 케이블카로 말잔등까지 올라가 곧장 나리분지로 내려오는 약 2.5km의 골짜기. 첫 시도에서 쓰라린 깨달음을 얻은 대원들은 킥턴을 적절히 사용하며 한층 여유 있게 활강을 즐길 수 있었다.

스키계의 뉴 스쿨로 불리는 프리스타일 스키팀 X-CREW 멤버들은 3, 4m의 절벽쯤은 가볍게 점프하며 실력을 한껏 뽐냈다.

이틀간 총 4km의 스키 등반과 6.5km의 활강. 풍부한 적설량, 육지에 비해 나무가 적고 가파른 울릉도 계곡은 원래 한몸이었던 등반과 스키가 다시 봉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일반 스키장이 스키어를 온실 속의 화초처럼 기른다면 울릉도 산악스키는 야성이 살아 숨쉬는 무한 도전의 장이다. 울릉도는 이 행사를 앞으로 겨울철 주요 이벤트로 키워갈 계획이다.

울릉도=송철웅 통신원 <익스트림스포츠 칼럼니스트> timbersmith@naver.com

▼400~900m 고지대 가루형태 雪質 최상

나무 - 급경사 많아 ‘쇼트 턴’ 능력 필수▼

1946년 창립된 조선스키협회는 이듬해 지리산 노고단에서 첫 대회를 열었다. 노고단 눈이 시원치 않자 1948년 울릉도를 답사한 뒤 이듬해 제3회 대회를 울릉도 나리분지에서 개최했다.

눈이 많은 울릉도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벚나무, 대나무로 제작한 스키(썰매)를 교통과 수렵 목적으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저지대인 나리분지는 해양성 기후 특유의 높은 기온 때문에 눈이 무거운 게 단점이었다. 이에 따라 4회 대회부터는 대관령 일대로 무대를 옮기게 된다.

이번 성인봉 스키 등반과 활강은 해발 400∼900m의 고지대에서 시도됐다. 고도가 높은 이 구간의 설질은 최상이었다.

산악스키는 올라가는 동작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뒤꿈치가 위로 들리는 바인딩을 쓴다. 또 스키 바닥의 미끄러움을 상쇄하기 위해 클라이밍 스킨으로 불리는 실(Seal)을 장착하게 된다.

실은 원래 물개 등의 가죽을 스키 바닥과 같은 모양으로 길게 오린 것으로 접착제를 발라 붙인다. 물론 지금은 물개 가죽이 아니라 화학섬유로 만든 실이 사용된다.

울릉도 자연설은 전형적인 파우더(가루 형태의 자연설) 스타일이다. 나무를 피하기 위해선 고도의 쇼트 턴 능력이 요구된다. 또 70∼80도의 절벽에 가까운 곳이 많아 안전하게 내려갈 코스를 가늠하는 루트 파인딩 능력이 꼭 필요하다.

익스트림스포츠 마니아

○송철웅 씨는=눈은 길을 막기도 하고 터주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눈은 소통의 도구다. 대한스키지도자연맹 준지도자 자격증을 갖고 있으며 1991년부터 몇 해 전까지 스포츠조선 레포츠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스키는 물론 암벽등반, 요트, 카약, 산악자전거 등 극한 스포츠를 즐기는 ‘40대 신세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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