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히딩크들 “조국 사랑하지만 이기고 싶다”

  • 입력 2008년 8월 15일 02시 56분


1980년대 한국 배드민턴의 황제로 군림했던 박주봉 일본 대표팀 감독. 그가 지도한 일본 선수들이 이번 올림픽에서 여자 복식 세계 최강인 중국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베이징=연합뉴스
1980년대 한국 배드민턴의 황제로 군림했던 박주봉 일본 대표팀 감독. 그가 지도한 일본 선수들이 이번 올림픽에서 여자 복식 세계 최강인 중국을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베이징=연합뉴스
■ 외국팀 이끄는 한국출신 감독 활약상

박주봉 감독 日 배드민턴 맡아 세계1위 꺾는 파란 연출

김창백 감독 中 하키 여자대표팀 업그레이드… 金 노려

최영석 감독 태국 태권도에 비법 전수 ‘한국 킬러’ 부상

“반역자가 되고 싶다.”

6월 유럽을 뜨겁게 달궜던 2008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08)에서 러시아 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한 거스 히딩크 감독은 조국 네덜란드와 8강전을 앞두고 스스로 반역자가 되기를 원했다. 히딩크의 러시아는 네덜란드를 3-1로 꺾고 20년 만에 유로 2008 4강에 올랐다.

두 달 뒤인 8월 태극기가 아닌 다른 나라의 국기를 가슴에 달고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한 그들도 히딩크와 같은 ‘반역’을 꿈꾸고 있다.

각국 대표팀을 이끌고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인 지도자들이 화제다. 이들 중 몇몇은 벌써 이번 대회에서 조국 대한민국과 일전을 치렀다. 히딩크처럼 드러내 놓고 반역자가 되고 싶다는 사람은 없지만 직접 가르친 선수들이 한국을 꺾어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게 분명하다.

가장 주목받은 ‘한국판 히딩크’는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 박주봉 감독. 그가 조련한 마에다 미유키-스에쓰나 사토코 조는 8강에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 랭킹 1위인 중국의 양웨이-장제원 조를 꺾는 파란을 일으켰다. 일본 배드민턴 사상 올림픽 첫 4강 진출을 박 감독이 이뤄낸 것이다.

그리고 4강에서 만난 상대는 한국. 마에다-스에쓰나 조는 한국에 졌다. 박 감독은 경기 전에는 “조국보다 승부가 먼저”라고 했지만 경기가 끝난 뒤에는 “세계 1위 중국을 꺾어 줬으니 꼭 금메달을 따라”며 한국 선수들을 격려했다.

한국 양궁이 세계 최강임을 입증하듯 이번 대회에 양궁 팀을 출전시킨 49개국 중 13개 국가가 한국인 지도자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1991년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을 맡아 외국 대표팀 한국인 지도자 1호로 불리는 석동은 감독은 이번에는 영국 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했다. 석 감독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때 남자 개인전에서 이탈리아에 금메달을 선사하며 한국 양궁의 진가를 확인시켰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개최국 호주 대표팀 감독을 맡아 역시 남자 개인전 금메달을 따낸 이기식 감독은 이번에 미국 대표팀 사령탑으로 참가했다. 이 밖에 콜롬비아 양궁 역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여자 단체전 출전권을 따낸 박면권 감독을 비롯해 말레이시아(이재형), 포르투갈(이명용), 이집트(문백운), 스페인(조형목), 멕시코(이웅), 터키(김정호)도 한국인이 감독이다.

자존심 강한 중국도 성적을 위해 한국인 감독을 모셨다. 중국은 하키 남녀대표팀 감독을 모두 한국인 지도자로 채웠다.

1999년부터 중국 여자 하키팀을 맡아 중국 하키 수준을 한 계단 끌어올린 김창백 감독은 ‘하키의 히딩크’로 불린다. 그는 감독을 맡은 이듬해 열린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중국 여자 하키를 세계 5위에 올려놓았고 2002년과 2006년 아시아경기에서는 잇달아 금메달을 따냈다. 이번 올림픽에선 금메달을 노리고 있다.

중국 남자 하키팀 감독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남자 하키에 사상 첫 은메달을 안겼던 김상열 감독. 그러나 중국 남자 하키팀은 13일 한국과 조별 리그 경기에서 2골을 먼저 넣고도 2-5로 역전패했다.

경기가 끝나고 중국 기자가 “한국이 이겨서 좋은 것 아니냐”고 묻자 그는 “나는 한국인이지만 지금은 중국 감독”이라고 말해 승부의 세계에서는 조국보다 팀이 우선임을 분명히 했다. 중국 여자 핸드볼팀 사령탑은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강재원 감독이다.

태권도에서는 한국인 감독들이 기술 전수 수준을 넘어 종주국 한국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다. 베이징 올림픽 태권도 출전국 중 3분의 1가량이 한국인 사범에게 감독을 맡겼다.

2003년부터 대만 대표팀에 기술 지도를 하고 있는 이동완 코치는 한국으로서도 넘어야 할 산이다. 이 코치가 길러낸 천스신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대만에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 킬러’로 통하는 태국 대표팀 최영석 감독도 이번 올림픽에서 3개의 금메달을 노리며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태국은 지난해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주니어선수권 때 여자부 4체급에서 한국 선수를 누를 만큼 최 감독 영입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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