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점 탐험]1월1일 33일째 "새해첫날 코피터지게 걷다"

  • 입력 2004년 1월 4일 20시 54분


코멘트
새해 첫 날 운행 중 코피를 흘리던 박영석 대장이 솜으로 코를 틀어막고 지혈을 위해 썰매 위에 누워있다.
새해 첫 날 운행 중 코피를 흘리던 박영석 대장이 솜으로 코를 틀어막고 지혈을 위해 썰매 위에 누워있다.
날씨 : 맑음

기온 : 영하 17.5℃

풍속 : 초속 5.6m

운행시간 : 08:45-20:40 (11시간55분)

운행거리 : 35.0km (누계 :774.5km)

남극점까지 남은 거리: 355.7km

야영위치 : 남위 86도 48분 913 / 서경 81도 57분 194

고도 : 1,963m

87도까지 남은 거리: 20.7km

▼새해 첫날 코피 터지게 걷다!▼

새해 첫날 첫 출발은 한국을 향한 세배와 우렁찬 함성으로 시작된다.

"모두들 좋지 않은 상태에서 힘겹고 고통스런 시간이 계속 되겠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어 반드시 남극점에 가자"

박대장의 출발 전 '한 말씀'이다. 그러나 어디 박대장이 새해 첫날이라고 봐주는 사람인가. 출발부터 강철원 대원은 만신창이가 된 허벅지의 통증으로 걷기가 힘들어 뒤로 처진다. 첫 간식 전, 결국 보온병에 파시코를 타서 담아주고 비스켓 3개를 나눠주고는 상태 봐가면서 썰매자국 따라 천천히 운행하기로 한다. 힘들어하는 강철원 대원에게서 야영에 필요한 매트리스와 텐트 펙, 주식봉지를 받아서 나눠 넣는다. 나머지 대원들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박대장의 뒤를 따른다. '날씨가 좋을 때 조금이라도 더 가야한다'는 것이 박대장의 철썩같은 믿음. 새해 첫 날이라 촬영할 것이 많은 이치상 대원은 촬영을 마친 후 멀어져 간 대원들을 짧고 굵은 다리로 뒤쫓는 것이 벅찬 듯 좀처럼 간격을 좁히지 못한다.

첫 간식시간, 운행 중 가장 기다려지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30분 늦게 휴식시간을 갖는다. 문제는 항상 생각지 않은 곳에서 터진다. 휴식을 마치고 출발준비를 하는데 박대장의 코에서 코피가 쏟아진다. 박대장은 대수롭지 않게 휴지로 코를 틀어막고 출발한다. 하지만 좀 가다보니 하얀 눈밭에 붉은 핏방울이 보인다. 다시 멈춰서는 박 대장. 코를 틀어막은 하얀 휴지가 이미 빨간 색으로 흥건하다. 박대장이 코에서 휴지를 뽑자 뭉친 핏덩이가 떨어져 눈밭을 붉게 물들인다. 목 채 뚝 부러져 눈밭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 같다. 박대장은 의약품 주머니에서 솜을 꺼내 다시 코를 틀어막고 썰매 위에 누워 지혈을 한다. 10여분 후, 코피가 멈춘 듯 다시 출발하는 박대장에게 이치상 대원이 한마디 툭 던진다.

"그렇게 코피 터지게 걸으면 몸에 무리가 올 텐데"

박대장은 대답대신 이대원을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나침반으로 방향을 확인하고는 다시 코피 터지기 전의 속도로 걸음을 재촉한다. 다행히 다시 코피는 나지 않았다. 대원들은 내심 "간만에 여유 있게 걷겠구나"하고 마음의 끈을 느슨하게 푼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이자 '주관적 환상에 객관적 오류'. 결국 김치국부터 마신 꼴이 돼 버렸다. 코피 터져 버린 시간을 만회하려는 듯 박대장의 걸음은 더욱 빨라진다. 정신없이 따라 걷는 대원들. 그러다 갑자기 박대장이 걸음을 뚝 멈추자 "왜?"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같이 걸음을 멈춘다. 뒤를 돌아보며 씩 웃는 박대장.

"내가 남극에서 가장 바라던 설원이야"

박대장은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설원을 가리킨다. 경사를 느낄 수 없는 평평한 설원은 두 시간 이상 계속되었다. 정말 잘 나간다. '이렇게만 가면 하루 40km도 문제없겠다'고 생각하며 걷다보니 좋은 시절 다 갔다. 보기에도 경사가 꽤 있어 보이는 언덕으로 접어든다. 어제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울퉁불퉁 설면은 제멋대로이고 굳은 눈은 스키와 썰매 모두 힘겹게 만들고 이게 아니다 싶어 스키를 벗으면 푹푹 빠지고 어쩔 수 없다. 속도가 나지 않더라도 그냥 걷는 수밖에….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겠지'하며 스스로를 달래며 꺼이꺼이 언덕을 오른다. 썰매는 굴곡마다 쿵쾅거리고 덜컹댄다. 바닥에 멍이라도 들지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해 본다. 그러다보니 언덕을 거의 올랐다. 다 오르고 나니 정말 내리막 길이다. 남극점까지 계속 오르막이 되리라 생각했는데 내리막길이 있다. 그것도 30분이나 되는 내리막길이다. 운행 종료를 앞두고 엄청난 행운이다. 썰매도 신이 났다. 슬슬 미끄러져 내려온다. 내리막이 끝나고 다시 언덕을 막 오를 때 쯤 운행을 마친다. 텐트를 치고 야영준비를 마칠 무렵 강철원 대원이 캠프로 들어선다. 생각보다 빨리 쫓아왔다. 텐트 안으로 들어온 강대원은 설원의 피를 보고 '대원들 중 누군가가 다쳐서 나를 필요로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쉴 새 없이 쫓아 왔단다. 강 대원을 걱정하던 대원들이 소처럼 소리 없이 웃는다.

11시간 55분 운행에 35km를 걸었다. 죽기 살기로 걸었는데도 그렇다. 12월 중순의 운행과 비교해 보면 실속 없는 운행이다. 그때는 휴식시간도 여유 있었고 그리 힘들게 걷지도 않았었다. 아마도 고도가 높아지면서 기온의 변화에 의한 눈 표면의 상태가 운행을 더디게 하고 탐험대원들을 지치게 하나보다. 박대장은 '길 위에 시간을 버리고 있다'며 더딘 운행을 아쉬워한다.

저녁 식사 후, 대원들의 관심 속에 신년인사 차 부쩍 늘어난 동아닷컴 게시판(격려의 글, donga.com)을 열어본다. 보고 싶은 사람들의 그리움에 가득한 글들, 그리고 유독 대원들의 관심을 끄는 허영만 화백의 갑신년 謹賀新年 카드는 잔잔한 감동이다. 박대장은 물론 탐험대원들 모두 호탕한 성격의 허영만 화백과 呼兄呼弟하는 허물없는 사이인데 孤立無援 남극의 설원에서 새해 인사를 멋진 그림으로 받으니 후배 사랑하는 선배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대원들 모두 감동 먹었다.

남극점탐험대 이치상 대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