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가볍지만, 마음 풍요로운 ‘거르주아’랍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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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MZ세대 놀이문화로 떠오른 ‘짠테크’
본보 기자의 ‘무지출 챌린지’ 도전기

기자가 들어가 있는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 ‘거지방’에서 이용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화면(위 사진)과 19명 규모의 ‘거지방’에서 
이용자들이 익살스러운 대화를 주고받는 화면. 최원영 기자 o0@donga.com·충북대 재학생 박모 씨 제공
기자가 들어가 있는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 ‘거지방’에서 이용자들이 대화를 나누는 화면(위 사진)과 19명 규모의 ‘거지방’에서 이용자들이 익살스러운 대화를 주고받는 화면. 최원영 기자 o0@donga.com·충북대 재학생 박모 씨 제공
《 MZ세대 ‘절약 놀이’ 함께해 보니


최근 서로 잔소리를 하며 절약을 독려하는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 일명 ‘거지방’이 젊은층 사이에서 인기다. 주머니는 가볍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운 ‘거르주아(거지+부르주아)’들의 유쾌한 절약 놀이에 동아일보 기자가 동참해 봤다.


“헤어오일 7090원짜리 사도 될까요? 인터넷 최저가입니다.”

400여 명이 포함된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 일명 ‘거지방’에서 동아일보 기자가 15일 다른 이들에게 조심스럽게 지출 허락을 구했다. 그러자 “집에 있는 올리브유로는 안 되나요?” “식용유 바르세요” 등 냉정한 답변이 돌아왔다.

“지금 제 머릿결이 수명을 다한 빗자루급인데 정말 안 될까요?” 용기를 내 다시 한번 요청해 봤지만 ‘동료 거지’들의 답은 단호했다. 한편으론 식용유 운운하는 재치 있는 답변에 유쾌한 기분도 들었다. 이들의 싫지 않은 잔소리에 동기부여가 된 덕분인지 결국 헤어오일을 사지 않았다.

최근 지출을 줄이려는 젊은 세대들이 모여 서로의 소비 내역을 공유하는 이른바 ‘거지방’이 인기를 끌고 있다. 대화방마다 규칙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의 지향점은 모두 같다. “보고하고, 소통하고, 절약하고, 독려한다.”

‘거지방’ 외에도 숨어 있던 신용카드 포인트를 현금으로 회수하거나 지방자치단체의 무료 강의로 자기계발을 하는 등 일명 ‘짠테크’(짠돌이+재테크) 방법도 진화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생은 한 번뿐’이라며 플렉스(flex·과시형 소비)를 외치던 청년들이 고물가와 경기 둔화 때문에 실용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모양새다.》





● 잔소리하고 허리띠 졸라매며 ‘동료애’ 느껴
동아일보 기자는 카카오톡 오픈채팅에서 운영 중인 200여 개의 거지방 중 한 곳에 참여해 15일부터 일주일 동안 ‘스즈메의 통장단속’이란 닉네임으로 이용자들과 함께했다. 닉네임은 최근 인기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따 왔다. 거지방 참여자들은 이처럼 자신의 절약 포부를 재치있게 담아낸 닉네임 옆에 월 또는 주 단위 지출액과 목표 금액을 함께 적으며 채팅방 동료들에게 자신의 재정 상태를 알린다.

참여자들은 지출 전 다른 이들의 승인을 구하거나 지출 후 내역을 써 올리면 된다. 불필요한 지출에는 꾸짖음을 뜻하는 “갈(喝)!”이란 불호령과 함께 채팅방에서 잔소리가 비 오듯 쏟아진다. 반면 절약과 무지출을 한 경우에는 칭찬을 받을 수 있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김모 양(16)은 1180명이 참여하는 거지방에서 ‘입 벌려라 풀 들어간다’란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양은 “그간 절제 없이 용돈을 쓰다 보니 늘 돈이 모자랐다. 이제 돈이 없으면 풀이라도 뜯어 먹겠다는 포부로 닉네임을 지었다”고 밝혔다. 그는 “서로 지출 내역을 보고 잔소리해 주는 게 거지방의 묘미”라며 “충고에서 애정이 느껴져 소속감도 생긴다. 다른 또래들이 돈을 얼마나 쓰는지 보면서 절약 생활에도 동기부여가 된다”고 했다.

충북대에 다니는 박모 씨(22)는 지난달 친구의 권유로 19명 규모의 소수정예 거지방에 참여했다. 박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스스로 ‘거지’라고 소개하며 주로 교내 학생식당과 편의점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박 씨는 “방 이용자들이 10원 단위까지 더치페이하는 걸 보고 자극받아 더치페이를 꼼꼼히 하는 습관이 생겼다”며 “택시 대신 버스를 탔다고 채팅방에 보고하고 칭찬받았을 때 스스로도 뿌듯했다”고 했다.

거지방 참여자들에게는 지출 내역 공유가 하나의 재미다. 또 주머니는 가볍지만 마음만은 풍요로운 ‘거르주아’(거지+부르주아)라고 서로를 다독이며 유쾌한 ‘절약놀이’로 허리띠를 졸라맨다.

● 무지출 챌린지 3일 도전

거지방에선 각자 실천 중인 절약 팁도 활발하게 공유한다. 대표적인 게 일정 기간 아예 돈을 쓰지 않는 ‘무지출 챌린지’다. 무지출 챌린지 실천 방법으로는 선물로 받아놓고 쓰지 않았던 모바일 기프티콘으로 끼니를 해결하는 일명 ‘깊털’(기프티콘 털어 먹기), 냉장고 속에서 잠자고 있는 식재료를 활용하는 일명 ‘냉털’(냉장고 털어 먹기), 그리고 고전적 수법인 ‘빌붙기’ 등이 있다.

기자도 주말이 포함된 20∼22일 사흘 동안 무지출에 도전했다.

첫날인 20일에는 ‘냉털’을 시도했다. 아침으로 반년 동안 냉동실에 방치돼 있던 닭가슴살을 꺼내 먹었다. 점심에는 계란, 배추 등 집에 있던 식재료로 부침개와 국 등 간단한 요리를 해 먹었다. 친구와 약속이 있었던 저녁에는 상대의 양해를 구하고 친구 집에 식재료를 들고 가 알리오올리오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둘째 날인 21일에는 ‘깊털’에 도전했다. 일요일인 만큼 여유롭게 지내겠다는 생각으로 선배 기자와 동료들로부터 선물로 받아놓고 쓰지 않던 프랜차이즈 카페 기프티콘 2개를 모아 샌드위치 3개와 샐러드 등 총 2만2000원어치를 사 왔다. 이를 야금야금 나눠 먹으며 종일 끼니를 해결했다.

마지막 날인 월요일에는 출퇴근하느라 버스비 5600원을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빌붙기’를 시도해 점심에 선배 기자로부터 국밥과 커피를 얻어먹었다. 저녁에는 다시 냉털 모드로 돌아와 집에서 유통기한이 임박한 요거트와 컵라면을 먹었다. 결국 72시간 동안 지출한 금액은 5600원에 불과했다.

다만 이 같은 절약법은 사회생활을 하는 경우 지속가능성이 높지 않다. 모임이나 약속을 극단적으로 줄여야 하고 외출에도 제약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직장인은 휴일인 주말에 몰아서 무지출 챌린지에 나서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이 같은 이유로 거지방 이용자 중에는 외출을 최대한 자제할 수 있는 수험생, 취업준비생 등이 많았다.

● “몇백 원이 어딘가요” 짠테크 찾는 MZ세대

소비를 자제하는 방법 외에도 신용카드 포인트를 현금으로 회수하는 등 모르면 억울한 ‘돈 버는 노하우’도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사이에서 활발하게 공유되고 있다.

2021년부터 여신금융협회에서 제공하고 있는 ‘카드 포인트 통합 조회 및 계좌 입금 서비스’(www.cardpoint.or.kr)를 활용하면 여러 신용카드사에 잠자고 있는 카드 포인트를 한 번에 계좌로 이체할 수 있다.

이 서비스는 이달 초 한 유튜버가 올린 소개 영상이 조회수 209만 회를 기록하며 청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서비스 사이트에 순간적으로 접속자가 몰리면서 한때 접속 대기 시간이 500분까지 길어지기도 했다.

직장인 A 씨(28)도 이달 초 영상을 보고 해당 사이트에 접속했다가 자신 앞에 5만 명이 대기하고 있고, 대기 시간은 440분이 넘는다는 문구를 접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업무를 보다 마침내 접속에 성공해 1만 원가량의 포인트를 환급받았다. A 씨는 “많이 기다리긴 했지만 1만 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잖느냐. 한 끼 식사는 너끈히 해결할 수 있는 금액”이라고 강조했다.

지방세 고지서를 우편 대신 모바일로 받으면 800∼1600원을 깎아주는 서울시 정책도 입소문이 나고 있다. 제도를 홍보하기 위해 신규 신청자를 대상으로 매달 1만 명을 추첨해 모바일 커피 쿠폰도 준다는 소식에 ‘짠테크’에 목마른 MZ세대들의 신청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직장인 이모 씨(27)는 “물가도 많이 오른 마당에 통장에서 나도 모르게 새어나가는 것들을 하나씩 찾아 바로잡고 있다”며 “몇백 원씩이라도 지출을 줄이면 스스로도 뿌듯하다”고 말했다.

● 0원으로 ‘갓생’ 살기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성실하게 매진하는 일명 ‘갓생(God+生·훌륭한 인생)’ 직장인들은 무지출 챌린지와 자기계발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책을 사는 대신 도서관에서 빌리고, 자격증 공부를 할 때는 학원에 다니는 대신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무료 강의를 듣는 식이다.

부산 연제구에 사는 호텔리어 박수현 씨(29)는 자기계발비를 아끼기 위해 다른 지자체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온라인 강의를 찾아내 듣는다. 박 씨는 경기도 평생학습플랫폼의 무료 강의를 듣고 컴퓨터활용능력 2급 자격증을 땄다. 최근에는 인천시 무료 강의로 임상심리사 2급 시험을 공부하고 있다. 그는 “매달 20만, 30만 원 하는 수강료도 요즘 같은 시기엔 큰돈”이라며 “무료로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찾아 자기계발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점이나 전자책 애플리케이션(앱)을 무료로 대체할 수 있는 공공도서관 앱도 인기를 끌고 있다. 경기 부천시에 사는 직장인 이연경 씨(28)는 최근 “책을 사 보려고 해도 요즘에는 한 권에 2만 원 안팎인 경우가 많아 부담이 작지 않다”며 “거주하는 지역 도서관이 아니더라도 시내 도서관 연계를 통해 책을 빌릴 수 있는 공공도서관 앱을 애용하고 있다”고 했다. 이 씨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다들 혜택 많이 받으시라”며 공공도서관 앱 현황 링크를 공유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고물가와 경기 둔화의 영향으로 청년들의 소비 패턴이 과시형에서 실속을 추구하는 쪽으로 달라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허경옥 성신여대 소비자생활문화산업학과 교수는 “거지방, 짠테크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최근 실속형 소비 트렌드가 급속하게 확산되는 추세”라며 “절약이 젊은층 사이에 일종의 문화로 자리 잡으면서 더 이상 곤궁하거나 민망한 일이 아니라 실리와 만족감을 얻는 즐거운 생활 노하우로 자리 잡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원영 기자 o0@donga.com
#거르주아#mz세대 놀이문화#짠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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