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다시 희망으로]
英, 세제 혜택 통한 사후기부 활발
국내선 전체 기부금의 0.5% 불과
상속세 감면 등 제도 뒷받침돼야
차은혜 씨(21)는 지난해 국제구호단체 ‘희망친구 기아대책’에 1억 원의 유산을 기부하기로 약정했다. 국내 최연소 유산기부자다. 갓 성인이 된 그에겐 당연히 기부할 재산이 마땅치 않았다. 차 씨는 30년 동안 납부하는 생명보험의 보험금 수익자를 기아대책으로 지정하는 형식으로 유산을 기부할 계획이다.
차 씨의 기부에는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부모님은 기아대책 고액 후원자 모임인 필란트로피클럽 회원이다. 어머니는 유산기부를 약정한 헤리티지클럽 회원이기도 하다. 차 씨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기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성인이 되면 꼭 나눔을 실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英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뒷받침”
최근 이처럼 유산을 법정상속권자가 아닌 공익법인 등 제3자에게 기부하는 유산기부가 조금씩 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보편적인 문화는 아니다. 유산은 자녀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인식이 강한 데다 각종 세제혜택 등 유산기부를 활성화시킬 제도적인 받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전체 기부금 중 유산기부 비중이 0.5%에 불과하다. 반면 영국은 33%, 미국은 9%에 이른다. 공익을 위해 부(富)를 나누겠다는 부호(富豪)들의 솔선수범과 정부의 지원이 어우러진 결과다.
영국도 20여 년 전까지는 유산기부에 대한 인식이 낮았다. 변화를 이끌어낸 건 사회의 리더들이었다. 금융컨설팅회사 핀스버리의 롤런드 러드 창업자는 2011년부터 재산의 10%를 자선단체에 기부하면 상속세 10%를 감면해주는 ‘레거시10(Legacy10)’ 캠페인을 전개했다. 억만장자 기업인들의 동참이 이어졌고,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 등 유력 정치인들도 뜻을 함께했다.
눈여겨볼 점은 영국 정부의 노력이다. 상속세 세수(稅收)가 줄어들 것이 뻔했지만 입법을 주저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경제적 타당성 평가와 국민 여론조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레거시10 도입의 필요성을 검토했다. 줄어든 세수가 민간으로 흘러가 노숙자, 이민자, 빈곤계층 등 지원에 쓰이면 장기적으로는 정부의 복지 부담을 낮출 수 있다는 게 영국 정부의 판단이었다.
그 결과 영국에서 유산기부는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선택지가 됐다. 유산기부자는 평균적으로 재산의 20%가량을 3∼4개 단체에 나눠 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0파운드(약 15만6000원)씩 소액을 기부하기도 한다. 꼭 큰돈이 아니더라도 능력껏 재산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떠나는 아름다운 마무리를 택하는 것이다.
김희정 한국자선단체협의회(자선협) 사무총장은 “영국은 변호사와의 세제 상담 등을 포함한 유언장 작성 캠페인이 유산기부 인식 개선에 큰 도움이 됐다”며 “생을 마감할 때 배우자와 자녀, 친구, 그 다음으로 자선단체를 떠올려 달라는 슬로건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정부, 국회가 논의 앞장서야
최근 국내에서도 자산가들의 통 큰 기부가 화제가 됐다. ‘배달의민족’을 창업한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이사회 의장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은 재산 절반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이들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부부와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 설립한 글로벌 자선단체이자 자발적 기부 운동인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의 219, 220번째 회원이 됐다.
이 같은 문화가 확산되려면 제도적인 지원이 중요하다. 2019년 자선협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26.3%가 ‘유산기부 의사가 있다’고 답했다. 상속세 감면 등 유산기부법이 제정됐다고 가정했을 땐 긍정 답변이 두 배인 51.6%로 높아졌다. 총유산에서 기부하고 싶은 자산의 비중은 10∼19%를 선택한 응답이 17.1%로 가장 많았다.
하지만 유산기부 활성화를 위한 정부와 국회의 논의는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한국형 레거시10 제도 도입 법안(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 개정안)은 기획재정부 반대로 상임위 소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현금이나 부동산을 기부하면 기부 금액의 일부를 본인이나 유족이 연금처럼 돌려받는 ‘기부연금’ 제도도 19대 및 20대 국회에서 잇따라 발의됐지만 모두 폐기됐다. 가계자산의 75%가 부동산에 집중된 한국에선 기부연금이 노후자금을 마련하고 기부를 활성화할 수 있는 제도다.
기부자의 선의만으로 기부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상속인들이 사망자의 재산 중 일부를 본인 몫으로 주장할 수 있는 유류분(遺留分) 반환 청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자선협 설문조사에서도 ‘가족이 유산기부에 동의할 것 같다’는 응답은 49.9%에 그쳤다. 유산기부를 결정하기에 앞서 가족과의 공감대 형성이 중요한 이유다.
김호경 밀알복지재단 특별후원팀장은 “유산기부는 결국 개인의 기부가 아닌 가족이 함께하는 기부인 만큼 자녀의 동의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며 “세제혜택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통해 가족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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