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재배 까다로운 쌀은 어떻게 한국인의 주식이 됐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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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 발달과정

농부가 갓 수확해온 벼를 말리는 모습. 동아일보DB
농부가 갓 수확해온 벼를 말리는 모습. 동아일보DB
1970년대 이전에는 춘궁기, 보릿고개, 절량농가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특히 봄철이면 신문마다 절량농가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절량농가’란 양식(쌀, 보리 등)이 떨어져 밥을 해 먹지 못하는 농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부터 점점 절량농가라는 말이 사라집니다. 오늘은 우리나라에서 벼농사가 발전하면서 절량농가가 사라져간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벼농사와 농업기술의 발달

사람이 가장 많이 먹는 곡식은 쌀, 밀, 옥수수 등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재배하기 어려운 작물은 단연 쌀입니다. 재배 조건과 과정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밀과 옥수수는 경사진 곳에서도 키울 수 있습니다. 반면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평평한 곳에 논을 만들고, 물을 공급하기 위한 수리시설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논에 거름을 많이 주고 토지를 가꾸어야 합니다. 쌀의 재배 과정은 다른 농작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합니다. 벼의 싹 틔우기, 못자리에서 모 키우기, 모내기, 김매기, 벼 베고 타작하기, 도정(벼의 껍질을 벗겨 쌀로 만드는 것)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정부와 농민은 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크게 두 가지를 열심히 해 왔습니다. 첫째는 농지의 면적을 넓히고 농사짓기 좋은 땅을 만드는 일입니다. 개간, 간척, 저수지 만들기, 농로와 수로 정비 등이 대표적입니다. 둘째는 농업 기술을 발전시키고 농기구를 개량하는 일입니다. 종자 개량, 거름 주기, 병충해 방재, 잡초 제거, 농기구 개량 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농지 증가와 농업 기술의 향상은 3000년에 걸쳐 아주 조금씩 변화했고, 그에 따라 생산량도 서서히 증가하였습니다. 모내기 방법이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데 약 500년이 걸렸습니다. 농업 기술은 부모에 의해 자식에게 전수되면서 천천히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벼농사 과정이 안정적으로 관리되었지요.

농업은 기후의 영향, 특히 가뭄이 큰 변수였습니다. 가뭄으로 생산이 줄면 국가에, 그리고 개개인의 삶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과거에 쌀은 언제나 부족한 상태였고, 쌀의 증산은 정부와 모든 농민의 꿈이었습니다. 보통 평년작보다 생산량이 5∼10% 늘어나면 풍년, 그만큼 줄어들면 흉년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풍년이 들어도 식량이 남아도는 시대는 없었고, 우리 역사상 거의 3000년 동안 늘 쌀은 부족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통일벼 보급과 쌀의 자급자족 성공

쌀의 자급자족이 가능해지고 절량농가가 사라진 시기는 1970년대 중반입니다. 이 시기 쌀 생산이 급증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종자 개량, 다양한 농자재의 보급, 정부의 강력한 쌀 증산 정책이죠.

벼의 품종은 크게 동남아시아에서 많이 재배하는 인디카종과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종으로 나뉩니다. 인디카종은 쌀에 찰기가 없는 품종이고, 자포니카종은 찰기가 많고 밥맛이 더 좋은 품종입니다. 1960년대 중반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는 인디카종을 개량하는 데 성공했고, 그 벼의 이름을 IR8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품종은 줄기가 강하고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며, 질소비료를 많이 주어도 웃자라지 않고, 벼 이삭이 무거워도 쓰러지지 않으며, 잎이 두꺼워 광합성에 유리한 특성이 있었습니다. 수확량을 두 배로 늘릴 수 있어 ‘기적의 볍씨’라고 불렸습니다.

우리나라는 IR8 계통의 볍씨에 관심을 두고 농촌진흥청을 중심으로 새로운 품종을 개발했습니다. IR8과 다른 품종을 교배해 새로운 품종을 개발했고, 이 벼의 이름을 ‘통일’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통일벼 재배에 성공한다면 약 30%의 증산이 예상되었습니다. 그런데 통일벼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후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냉해를 입을 수 있었고, 밥맛도 소비자들의 기호에 잘 맞지 않았습니다. 당시 농업 전문가들은 통일벼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정도 실험재배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통일벼 보급을 강행했습니다. 농업 관련 공무원은 농민들에게 재배 기술을 지도하고, 일반 공무원과 이장, 새마을지도자 등은 통일벼를 더 많이 심도록 독려하였습니다. 농민들은 냉해를 방지하기 위해 당시 보급되기 시작한 비닐을 이용해 보온 못자리를 만들었습니다. 화학비료와 농약도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1977년에 쌀 4000만 석 이상(쌀 자급률 113%)을 수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처음으로 쌀의 자급자족에 성공한 것입니다.

○쌀 자급자족 달성의 한계

쌀의 자급자족은 우리나라 농업사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한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1977년 이후 통일벼 재배에 문제가 나타났습니다. 냉해 피해, 쌀 맛이 떨어지는 점, 재배에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쌀 가격이 낮다는 점 등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정부는 통일벼 재배 면적을 유지하기 위해 통일벼를 시중 가격보다 비싸게 사들이는 수매제도를 운영하며 재배를 독려했습니다. 그러나 소비자의 외면, 수매제도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재정적자 문제, 쌀 소비의 감소 등으로 통일벼 재배를 포기합니다. 통일벼는 1980년대를 전후해 재배 면적이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우리 들판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쌀은 자급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육류와 밀가루 등의 소비가 늘고 쌀의 소비가 줄었기 때문입니다. 자포니카 계열의 품종 개량도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로 농약과 화학비료는 생태환경에 피해를 줬습니다. 농약을 뿌리다 병에 걸리는 농민도 증가했습니다. 셋째로는 쌀 이외의 작물들은 수입에 의존하면서 식량자급률이 점점 떨어졌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쌀을 제외하고 대부분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다른 식량자원과 농업 발전에 소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
#재배#벼농사#발달과정#주식#한국인#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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