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은 불길속 이웃집 문 두드려 깨워…‘사망자 0명’의 기적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9일 21시 20분


코멘트
8일 밤 발생한 울산 삼환아르누보 주상복합아파트의 화재는 발생 초기 33층 건물 외벽 전체가 불길에 휩싸일 정도로 크고 거셌다. 바람을 타고 날린 불씨가 인근 대형마트에 떨어져 불이 옮겨 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수라와 같은 현장에서도 주민들과 소방대원들은 서로를 도와가며 어둠을 뚫고 화재 현장을 탈출했다.

● 변기 물로 적신 수건 들고 맨발로 탈출
주민들은 당시 상황만 떠올려도 온몸이 떨린다고 했다. TV 시청을 하다가 창밖으로 떨어지는 불덩이를 발견한 주민 A 씨는 ”대피하려 했더니 현관문이 화염 열기에 뜨거워져 녹아내렸는지 열리지가 않았다“며 ”설상가상으로 수돗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A 씨는 급한 대로 변기를 열고 수적을 적신 뒤 수 차례 현관문을 발로 차서 겨우 집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건물 밖에는 속옷과 맨발 차림으로 뛰쳐나온 주민들이 대다수였다.

이날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병원에 이송된 주민들은 90명이 넘는다. 대부분 연기 흡입이나 가벼운 찰과상 등 경미한 부상만 있었다. 중상자 3명도 연기 흡입 등이 원인으로 생명에 지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모두 현재는 병원에서 귀가 조치했다.

주민들은 ”하늘이 도왔다“고 입을 모았지만, 서로를 도와가며 차분하게 피신한 주민들의 대응이 빛이 났다. 많은 주민들이 화마를 피해 이동하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웃집들의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다.

대피 중에 두 딸을 놓쳤던 허모 씨(44)도 이웃을 챙기느라 돌발상황을 맞았다고 한다. 가족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며 집집마다 벨을 누르며 ‘불이 났다’고 알렸다. 그런데 잠깐 아이들과 몇 발자국 떨어진 사이에 갑자기 사방에서 연기가 들이닥치며 서로를 잃어버렸다. 허 씨는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주민들도 함께 살아야 한단 심정이었다“며 ”이웃이 딸을 보듬어주고 대피소로 데려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끔찍하다“고 말했다.

먼저 탈출한 주민들은 이웃들과 휴대전화나 모바일메신저로 소통해 소방대원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아파트 1층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50대 여성 B 씨도 28층으로 대피한 한 주민과 휴대전화로 통화해 현장지휘본부에 상황을 전달했다. 특히 긴박한 상황에도 어린아이와 여성, 어르신들을 먼저 돌봤다. 옥상으로 대피했던 김경용 씨(57)는 아래층에서 여성 목소리가 듣곤 곧장 소방대원에게 구조를 요청했다. 현장 소방대원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도와준 덕에 현장 상황을 신속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고 감사했다.

●쓰러진 여성 업고 33층 뛰어 내려가
소방당국의 발 빠른 대응도 참사를 피하는데 한몫했다. 소방 선발대는 8일 오후 11시 14분 최초 화재 신고가 들어온 뒤 5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 빨리 출동한 덕에 화재가 갑자기 커졌을 때도 대처가 신속했다. 불이 갑자기 번졌을 때 대응 2단계를 조기 발령하고 주민들에게 대피를 안내할 수 있었다.

한 구조대원은 20대 여성을 업고 33층을 계단으로 뛰어 내려오기도 했다. 울산남부소방서 소속인 이정재 구조대장은 김호식 소방교 등 3명과 함께 8일 자정 무렵 33층에서 주민 3명을 찾았다. 이 대장은 ”연기가 자욱한 집 안 방문을 열어보니 여성 3명이 창문 쪽에서 간신히 숨만 쉬고 있었다“고 떠올렸다.

김 소방교가 먼저 상태가 가장 심각한 이모 씨(20)를 업고 내려간 뒤 이 대장은 나머지 여성들을 옥상으로 대피시켰다. 이 대장은 ”무거운 장비를 든 채 성인 여성을 업고 내려가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김 소방교가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는 마음에 초능력을 발휘한 것 같다“고 했다.

소방당국은 15층 피난안전구역(대피층)에 전진지휘소를 설치해 진압을 이끈 것도 주효했다. 소방 관계자는 ”이곳에 200여 명이 투입돼 교대로 아파트 곳곳을 돌며 인명 수색과 구조에 주력했다“고 전했다.

건축법시행령 제34조에 따르면 30층 이상 49층 이하 준초고층건물은 전체 층수의 2분의 1에 해당하는 층으로부터 상하 5개층 사이에 대피층을 설치해야 한다. 소방당국은 ”대피층은 내화(耐火) 구조를 갖춘 구역으로 화재 시 주민들의 임시 피난처이자 소방 작업을 위한 전초기지가 된다“고 전했다.

이 주상복합아파트는 15층 피난 층이 설계 당시부터 핵심적으로 건축됐다고 한다. 해당 건물을 설계한 한만원 HNS건축사사무소 소장은 ”설계부터 대피층 마련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해당 공간은 주거시설이 없는 텅 빈 공터와 같은 곳으로, 위아래로 내화 설계가 돼 있는 층“이라 설명했다.

울산=김태성기자 kts5710@donga.com
울산=조응형기자 yesbr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