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과 빠른 몸놀림…‘선상의 탁구 결투’가 준 선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14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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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은 국적선과 송출선으로 나뉜다. 국적선은 한국 선주가 운항하는 선박이라 한국 항구를 모항(母港)으로 하므로 매달 한번은 우리나라에 기항한다. 송출선은 외국선주가 운항하는 선박이라 한국에 기항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1980년 후반에는 당시 승선계약에 따라 최소 10개월은 승선해야 휴가를 올 수 있었다. 그 기간을 어찌 바다 위에서 보낼 것인가. 몇 년 승선생활을 하다보면 선원들은 각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체득한다. 하루 8시간 당직, 잠자는 8시간을 빼면 8시간이 남는다. 배는 좁고 육지에서처럼 외출을 할 수도 없으니 답답하다. 나는 TV 연속극을 담은 비디오를 보거나 신동아 같은 월간지를 보며 무료함을 달래곤 했다. 선원 중에는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 위하여 운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배에서 운동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역기, 탁구, 골프연습 등이 있었다. 골프와 역기는 혼자만의 운동이라서 다소 심심하다. 당시 배 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운동은 탁구였다. 여러 명이 같이 할 수 있고 몇 시간이고 즐길 수 있다. 나는 매일 점심을 먹고 1, 2시간씩 동료들과 탁구를 쳤다. 단식도 있고 복식도 있었다. 내기를 해 맥주를 나눠 마시기도 했다. 배에서 마시는 맥주는 면세품이라 아주 저렴했다. 나는 탁구를 제법 잘 치는 편이어서 여기저기 많이 불려 다녔다. 배에서는 누가 실력자인지 금방 알려지고 이내 인기를 끈다. 승선해 신참이 올라오면 그 사람이 탁구를 얼마나 잘 치는지가 선원들의 관심사였다.

외국 항구에서 정박 중인 다른 선박과의 대결도 벌어졌다. 일본의 어떤 항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항해 중 우연히 전화통화를 하면서 알게 된 한 선박의 1등 항해사가 탁구시합을 제안했다. 자기 배에는 실력이 수준급인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나도 우리 배에 선수들이 많다고 큰소리 쳤다. 결국 시합이 성사됐는데 막상 나와 함께 갈 선원들이 없어 혼자 적진으로 들어가게 됐다. 나를 초대한 그 항해사는 “우선 우리 배의 6등 실력자와 먼저 게임을 해보라”고 했다. 자존심이 좀 상했지만 경기에서 이겼고 5등, 4등, 3등도 차례로 무너뜨렸다. 경기 내내 상대방 선원들의 응원 소리가 시끌벅적했다. 다음 상대는 마침내 그 1등 항해사였다. 그는 돌연 “다음에 하자”며 경기를 접었고 게임은 그렇게 끝났다.

승자에 대한 예우도 톡톡히 받았다. 그 선박은 알라스카에서 잡은 연어를 운반하는 어획물 운반선이었는데 연어를 몇 마리 나에게 줬다. 우리 배로 복귀한 나는 선원들과 함께 떠들썩한 연어 파티를 벌였다. 일본 선박에서의 탁구시합 스토리를 들은 우리 선원들은 박수 치며 나를 치켜세웠다. 선원들이 나를 제법 잘 따르게 된 배경에는 탁구의 영향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가 몸놀림이 빠르고 경쾌하다고 한다. 이는 배에서 10년 동안 친 탁구의 덕분이다. 선상에서 즐긴 탁구는 이렇듯 나로 하여금 리더십을 세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하면서 장차 육지에서 수십 년을 살아갈 체력도 길러준 취미생활이었다.

김인현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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