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금의 자유’ 찾아 떠난 산사나이, 산이 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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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원정대 참변]히말라야에 잠든 김창호 대장

세계 최단기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산소 등정을 성공한 김창호 대장은 학술연구에 가까운 철저한 준비로 유명했던 
산악인이다. 안전하게 산행하자는 뜻으로 ‘집에서 집으로’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자연의 돌변 앞에 생을 마감해 
히말라야 구르자히말 남벽에 ‘코리안웨이’를 개척하겠다는 꿈을 달성하지 못했다. 사진은 2012년 히말라야 미등정봉 힘중을 세계 
최초로 등정한 뒤 환호하고 있는 김창호 대장. 동아일보DB
세계 최단기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산소 등정을 성공한 김창호 대장은 학술연구에 가까운 철저한 준비로 유명했던 산악인이다. 안전하게 산행하자는 뜻으로 ‘집에서 집으로’라는 좌우명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대자연의 돌변 앞에 생을 마감해 히말라야 구르자히말 남벽에 ‘코리안웨이’를 개척하겠다는 꿈을 달성하지 못했다. 사진은 2012년 히말라야 미등정봉 힘중을 세계 최초로 등정한 뒤 환호하고 있는 김창호 대장. 동아일보DB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싸왔던 짐을 다시 풀었다가 싸고는 했다. 강추위가 몰아치는 신들의 땅 히말라야 산중에 불빛은 없었다. 1700여 일의 단독 등반 도중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두려움과 외로움이라고 했다. 짐을 풀었다가 다시 싸는 것은 이를 이기기 위한 그의 습관이었다. 그 속에 들어 있던 램프며 취사도구며 지도 등을 보고 말을 걸고는 했다. “고장 나면 안 돼? 잘해 줄 거지?” 그래도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그는 어둠 속에서 낮에 갈아두었던 피켈을 갈고 또 갈며 자기 다짐을 하고는 했다.

산악인 김창호(49)는 국내 순수 알피니즘의 보루 같은 인물이었다. 수없이 들었을 “산에 왜 가느냐”는 질문을 들을 때면 그는 거창한 표현 대신에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 담배 한 개비 피우는 여유를 갖고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흔히들 상업 등반과 대규모 기획 등반이 늘어난 현대 등반에서 알피니즘의 낭만이 사라졌다고들 했다. 대자연과 마주한 고독 속에서 치열한 자기 고투를 벌이는 것이 산악계에 흐르는 알피니즘의 정신이었다.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궁극에는 대자연과의 합일 속에서 자유로운 육체와 정신의 행위를 추구했었다. ‘담배 한 개비의 여유’는 산 아래 세상의 경제논리와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그의 등산 철학의 압축된 표현이었다.

2013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산소 등정을 앞두고 김창호 대장이 동아일보에 보냈던 친필 사인. 동아일보DB
2013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산소 등정을 앞두고 김창호 대장이 동아일보에 보냈던 친필 사인. 동아일보DB
경북 예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산을 좋아했던 그의 젊은 시절은 이 같은 정신과 도전의 연속이었다. 서울시립대 산악부 출신으로 해병대를 제대한 그는 2000년부터 2006년 사이 1700여 일 동안 스폰서 없이 홀로 파키스탄과 네팔 등지의 히말라야 일대를 탐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2004년 8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잔당에게 붙잡혀 두 손을 묶이기도 했다. 탈레반들은 3m 거리 앞에서 그의 머리를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총알은 빗나갔다. 그는 그렇게 살아났다. 이때 그가 마련했던 방대한 자료는 이후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쓰였다.

학술연구에 가까운 철저한 준비가 그가 세계 최단기간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 비결이다. 그는 2013년 5월 19일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무산소 등정하며 2005년 7월 14일 낭가파르바트(해발 8125m)에 오른 것을 시작으로 7년 10개월 6일 만에 14좌를 모두 올랐다. 폴란드의 예지 쿠쿠치카가 세운 14좌 최단 기간 완등 기록을 1개월 8일 앞당긴 기록이었고, 무산소 등정으로는 카자흐스탄의 데니스 우룹코가 갖고 있던 8년 11개월 17일을 1년여 앞당겼다. 당시 전 세계에서 14좌를 완등한 31명 중 10년 이내에 기록을 달성한 사람은 6명뿐이었다. 무산소로 14좌를 완등한 이는 김창호를 비롯해 14명뿐이었다. 2012년 산악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리는 ‘황금피켈’ 아시아상, 2013년 대한민국 산악대상을 받았다.

그는 공기통을 메고 오르는 것보다 철저하게 ‘인간의 힘’으로 오르고자 했다. “산을 정복하기 위해 오르지 않는다. 등반 과정의 즐거움을 추구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산소가 일반 대기의 3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는 8000m 이상의 고지대에서 산행하는 고통을 어지럽고 메스껍고 온몸이 망치로 맞은 듯 피곤한 상태에서 걸어야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등반 도중 체력 저하로 옷을 입은 채로 오줌을 눌 정도였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에베레스트 정상에서는 체력 저하로 인해 실제로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고통스러웠던 산행 끝에 정상에 설 때면 온 세상과 대자연이 가슴에 들어오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거기서 다시 느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2013년 7월 다시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그는 같이 갔던 동료 서성호 대원의 사망으로 한동안 방황했으나 고난도 미개척지에서 더 큰 도전을 시작했었다. 장기적으로 산악인 기금을 마련해 후배 산악인들이 대기업 스폰서를 의식해 무리하지 않고 자유로운 산행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서울시립대 산악부 후배였던 부인과의 사이에 세 살 난 딸이 있다. ‘집에서 집으로(from home to home)’로 안전하게 산행하자는 좌우명을 갖고 있던 그였지만 대자연의 돌변 앞에 스러졌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히말라야#김창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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