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62명 사망…‘무단횡단 유혹’ 뿌리칠 방법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10일 1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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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둔촌동 진황도로에서 한 학생이 무단횡단을 하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택시 한 대가 달려오고 있다.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차량 
앞으로 길을 건너는 건 도로교통법상 분명한 불법이다. 하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곳곳에서 무단횡단을 일삼고 그로 인한 사고도 반복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서울 강동구 둔촌동 진황도로에서 한 학생이 무단횡단을 하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서 택시 한 대가 달려오고 있다.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차량 앞으로 길을 건너는 건 도로교통법상 분명한 불법이다. 하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곳곳에서 무단횡단을 일삼고 그로 인한 사고도 반복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5일 오전 3시 40분경 부산 부산진구 지하철 서면역 인근 중앙대로에서 한 20대 여성이 서모 씨(24)가 몰던 차량에 치였다. 여성은 중상을 당했다. 사고가 난 곳은 왕복 7차로 도로의 한가운데였다.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60㎞. 경찰은 20대 여성이 무단횡단을 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주변에 횡단보도는 없었다. 가장 가까운 횡단보도는 사고현장에서 남쪽으로 355m 떨어져 있다. 대신 지하상가가 조성된 지하보도가 있다. 부산의 중심을 통과하는 큰 도로이지만 횡단보도는 없다. 대신 신호등 옆에 ‘무단횡단 사고 잦은 곳’이라는 표지판만 달려 있었다.

● ‘무단횡단’의 유혹이 낳은 비극

경기 하남시 하남대로에서 한 남성이 빨간색 신호에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이곳처럼 중앙버스전용차로 정류소가 있는 횡단보도는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남=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경기 하남시 하남대로에서 한 남성이 빨간색 신호에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이곳처럼 중앙버스전용차로 정류소가 있는 횡단보도는 보행자들의 무단횡단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하남=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10일 경찰청 등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무단횡단 사고 9590건이 발생했다. 562명이 목숨을 잃었다. 꾸준히 줄고 있지만 여전히 하루 1명 이상이 무단횡단을 하다가 숨진다. 무단횡단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은 물론 보행자의 안전 불감증이다. ‘신호를 기다리기 귀찮아서’ ‘돌아가기 힘들어서’ 같은 이유 때문이다. 2, 3개 차로만 건너면 되는 중앙버스전용차로 정류장 부근에서 사고가 잇따르는 이유다.

현재 도심 일반도로에서는 200m 간격으로 횡단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주거지역이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간격을 줄일 수 있다. 횡단시설에는 횡단보도 뿐 아니라 육교나 지하보도도 포함된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주변의 횡단보도 사이 최단거리는 동서로 610m, 남북으로 650m다. 두 횡단보도 중간의 지하상가가 횡단시설 역할을 해 ‘200m 간격 규칙’을 지켰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이 오히려 보행자의 안전 불감증을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올 4월 20대 여성 2명이 숨지거나 다친 광주 무단횡단 사고 당시 횡단보도는 현장에서 각각 210m, 290m 떨어져 있었다. 대신 근처에 육교가 있었다. 차량들은 최소 500m 구간을 ‘막힘없이’ 달릴 수 있다. 반면 보행자는 멀리 돌아가야 한다.

또 어린이와 고령자 등 교통약자는 육교와 지하보도를 건너기가 쉽지 않았다. 도로교통공단이 2012년 무단횡단 경험이 있는 보행자 552명에게 이유를 물은 결과 285명(51.6%)이 ‘횡단보도가 멀어서’라고 답했다. 상당수 보행자가 차량 통행이 조금이라도 뜸해지면 무단횡단 유혹에 빠지는 이유다.

운전자의 안전 불감증도 사고를 키우는 원인이다. 광주 사고 당시 두 여성을 친 차량의 운전자는 시속 80㎞로 달리고 있었다. 해당 구간의 제한최고속도는 시속 60㎞다. 시야가 좁아지는 야간에 두 여성의 무단횡단을 미리 알아채기 힘든 점이 있지만 운전자가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본보가 올 1~5월 무단횡단 사고에 대한 법원 판결 214건을 분석한 결과 운전자에게 무죄가 선고된 건 9건뿐이었다. 모두 운전자가 과속하지 않고 차로를 올바르게 주행하는 등 교통법규를 완벽하게 지킨 경우다.

● ‘무단횡단’ 인식부터 바꿔야

1980년 경고문 옆 무단횡. 동아일보DB
1980년 경고문 옆 무단횡. 동아일보DB


도로교통법에서는 보행자가 반드시 횡단시설을 이용해 도로를 건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도 1차로 도로나 도심의 이면도로처럼 횡단시설이 없는 곳도 많다. 이 경우에는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에서는 가장 짧은 거리로 횡단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적용된다. 하지만 도로의 규모나 차량통행 상황 등 구체적인 기준이 없다. 경찰 관계자는 “해당 조항이 왕복 8차로나 10차로짜리 넓은 도로를 보행자가 마음껏 가로지르며 건널 수 있도록 한 건 아니다. 다만 무단횡단에 대해 현행 도로교통법에 불명확한 부분은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986년 올림픽대로 무단횡. 동아일보DB
1986년 올림픽대로 무단횡. 동아일보DB
전문가들은 ‘무단횡단하면 안된다’ 교육에만 기댈 수 없다는 의견이다. 가장 필요한 건 횡단시설 확충이다. 정부는 2016년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횡단시설 간 간격을 국지도로와 집산도로에는 100m까지 단축할 수 있게 했다. 이들 도로는 주택가와 상업지역처럼 보행자 통행이 잦은 곳과 간선도로를 잇는 왕복 1, 2차로짜리다. 중앙버스전용차로와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처럼 특수한 경우에는 이보다 더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육교와 지하보도 등을 모두 감안해 간격을 정한다. 순수한 횡단보도 확대에 걸림돌이다. 서울 종로와 명동 강남역 등에 횡단보도를 늘리는 것도 고객 감소를 우려한 지하상가 상인의 반발로 좀처럼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이다.

조준한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중앙분리대처럼 무단횡단 방지 시설을 늘리고 현재 3만 원인 과태료를 인상하는 등의 방법으로 보행자가 무단횡단 유혹을 단념하도록 해야 한다. 운전자가 과속하지 않고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이 필요한 만큼 보행자 스스로 무단횡단에 나서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보행자가 ‘무단횡단 유혹’을 스스로 뿌리칠 수있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눈앞에 횡단보도가 있으면 된다. 하지만 국내 도심의 횡단시설은 ‘200m 규칙’이 기본이다. 노인이나 어린이 등 교통약자 입장에서 200m는 심리적으로 꽤 먼 거리다. 횡단보도 사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조금만 급하거나 차량이 보이지 않으면 무단횡단 유혹에 빠지기 쉽다. 전문가들은 ‘200m 규칙’이 “보행자가 아닌 운전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조항”이라고 지적한다.

일본 도쿄 스키야바시교차로의 전방향 횡단보도를 보행자들이 건너고 있다. 전방향 횡단보도는 보행자가 짧은 시간에 최단거리로 길을 건널 수 있어 
보행자에게 친화적인 횡단보도로 쓰이고 있다. 도쿄=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일본 도쿄 스키야바시교차로의 전방향 횡단보도를 보행자들이 건너고 있다. 전방향 횡단보도는 보행자가 짧은 시간에 최단거리로 길을 건널 수 있어 보행자에게 친화적인 횡단보도로 쓰이고 있다. 도쿄=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해외에서는 무단횡단 문제를 해결하고 보행권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먼저 무단횡단을 줄이기 위해 보다 좁은 간격으로 횡단보도를 설치한다. 미국 버지니아주는 91m 간격으로, 영국은 90m까지 간격을 줄였다. 일본 시가지에서는 100m 간격의 횡단보도를 볼 수 있다. 한국 횡단보도 간격의 절반 수준이다.

‘전방향 횡단보도’도 쉽게 볼 수 있다. 전방향 횡단보도는 교차로를 지나는 차가 모두 동시에 멈추기 때문에 사고 가능성 자체가 줄어든다. 교차로를 가로지르면 최단거리로 이동할 수 있으므로 무단횡단 유혹도 줄일 수 있다. 일본 나가노(長野)현에서는 전방향 횡단보도를 설치한 뒤 3년간 보행자 교통사고가 35.3%나 감소했다. 국내에서도 경찰청과 각 지방자치단체가 지난해 말부터 주거지역과 업무시설 밀집지역처럼 보행자 통행량이 많은 곳을 중심으로 전방향 횡단보도 설치를 늘리고 있다.

보행자 중심으로 횡단보도를 설치하면 차량 통행이 방해 받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시뮬레이션 결과 횡단보도 설치 ‘200m 규칙’을 ‘100m 규칙’으로 바꿔도 차량 통행 속도는 크게 줄지 않았다. 경찰청 치안정책연구소가 2015년 서울 종로의 종로2가~종로4가 왕복 8차로 1㎞ 구간에 100m 간격으로 횡단보도를 설치했다고 가정하고 분석한 결과 차량 흐름은 시속 0.1㎞~0.4㎞ 느려질 뿐이었다.

‘보행자 작동신호기’도 보행권과 차량 흐름을 둘 다 잡을 수 있는 대안이다. 보행자 작동 신호기는 버튼을 누를 때만 횡단보도 신호등이 작동한다. 보행자가 없을 때 불필요하게 멈추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원활한 차량 흐름을 유지할 수 있다. 특히 보행자 통행량이 적은 야간에 차량통행을 원활히 하기 위해 도입된 점멸신호에서도 보행자 통행을 안전하게 할 수 있다. 미국과 독일 일본 등 교통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적극적으로 도입돼 지역 규모에 상관없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한국은 최근에야 설치가 늘고 있다. 서울 한강교량 보행로의 경우 자동차 전용도로 진출입로와의 연결지점에 설치해 보행자가 안전하게 길을 건널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운전자와 시민의 인식 부족, 장비 마련을 위한 예산 문제 등으로 설치가 지지부진하다.

서형석 기자 skytree0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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