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속으로]시간이 멈춘 ‘매축지마을’에 문화재가 생겼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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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째 통영칠기사를 운영 중인 박영진 씨(61)가 매축지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박 씨는 “많은 시민들이 오래된 우리 동네의 문화재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13년 째 통영칠기사를 운영 중인 박영진 씨(61)가 매축지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박 씨는 “많은 시민들이 오래된 우리 동네의 문화재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23일 오후 부산 동구 범일동 매축지(埋築地)마을은 한산했다. 거리를 오가는 주민도 거의 없는 데다 식당과 미용실 등 대부분 상점은 문을 닫았다. “젊은 사람은 다 떠나고 노인밖에 없어. 이렇게 추운 날엔 노인네도 다 집에 있지.” 시린 손을 비비며 종종걸음을 치던 한 주부가 말했다.

50년 토박이 최진철 씨(55)는 “수십 년간 재개발이 될 거라는 말만 나돌다 결국 동네가 망가졌다”며 “가난한 동네라고 쌀이든 뭐든 외부에서 지원받다 보니 땀 흘려 일하려는 사람도 거의 사라졌고 동네 상점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고 말했다.

매축지마을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형성됐다. 군수물자를 나르기 위해 일본이 부산항과 가까운 지역을 매립한 것. 그래서 몇몇 집엔 다다미방과 같은 일본식 건축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6·25전쟁 때는 피란민이 몰려 판자촌이 됐다. 1970년대부터는 재개발 소문이 퍼졌다. 1990년 도시환경정비사업 추진 구역으로 지정된 후 재개발이 추진됐지만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업성 부족으로 답보 상태다. 1000가구 중 300여 곳이 비어 있거나 폐가로 방치돼 있다.

최근 사회복지법인 ‘우리마을’은 주민들과 협의한 끝에 매축지마을의 역사를 간직한 8곳을 ‘마을문화재’로 선정했다. 우리마을은 3년 전부터 이 마을의 도시재생을 위해 이불세탁, 건강검진, 국수잔치 등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쳤다. 23일 마을 구석구석을 소개한 김일범 우리마을 팀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주민 스스로 삶의 터전을 문화재로 지정한 것은 전국 처음”이라며 “주민만 알고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보존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돕는 일도 도시재생의 일부여서 문화재 선정을 제안했다”고 말했다.

주민이 선정한 마을문화재는 마구간, 시간이 멈춘 골목, 마을 흙집, 통영칠기사, 보리밥집의 30년 된 로즈마리 나무, 벽화와 지혜의 골목, 영화 ‘친구’ 촬영지, 보림연탄지소 등이다. 각 장소에는 문화재 유래와 사연을 담은 현판이 설치됐다.

시간이 멈춘 골목은 장마철마다 물난리 때문에 마을 주민들이 힘들게 물을 퍼 날랐던 애환이 녹아 있다.

1.5L 생수통이 줄지어 선 지혜의 골목은 고양이가 생수통에 비친 모습을 보고 놀라 달아나도록 한 주민의 지혜가 엿보인다. 마구간에는 일제강점기 군마를 관리하던 곳을 광복 후에 피란민이 칸칸이 나눠 주거공간으로 재활용했다는 사연이 담겼다.

13년째 통영칠기사를 운영 중인 박영진 씨(61)는 “동네 어르신들이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도록 공예품 전시 공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집에 뭐든지 고장이 나면 꼭 달려가서 어르신을 도와주신다”며 박 씨를 치켜세웠다.

박 씨는 5년 전부터 매달 한 차례 홀몸노인을 위해 수백 그릇의 국수를 대접하고 있다. 그는 “개발에 밀려 언젠가는 마을이 사라지겠지만 이번에 우리가 정한 문화재를 통해 마을 역사를 더 많은 분이 알고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성명 기자 smkang@donga.com
#매축지 마을#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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