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성호]슈퍼 히어로를 꿈꾸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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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호 사회부 차장
이성호 사회부 차장
초등학교가 국민학교였던 시절, 나는 슈퍼 히어로의 존재를 믿었다. 우리 동네에 무슨 일이 나면 빨간 팬티를 입은 슈퍼맨과 원더우먼이 ‘빰빠밤∼’ 음악과 함께 날아온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처럼 생각한 코흘리개들이 많았다. 빨간 보자기를 목에 두르고 화단이나 턱 높은 마루, 심지어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리 부러지고 머리 깨진 추억이 비슷한 이유다. 지금도 슈퍼 히어로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하지만 아이언맨이나 캡틴아메리카 같은 슈퍼 히어로가 진짜 있다고 여기는 아이들은 별로 없다.

그런데 사람 목숨 살리는 슈퍼 히어로가 진짜로 있다. 한두 명이 아니다. 그들은 슈퍼 히어로답게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다 위급한 상황과 마주치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경기 평택시 수서고속철도(SRT) 지제역에 근무하는 역무매니저 이준구 씨(50)도 이 중 한 명이다. 9일 오전 그는 평소처럼 역사 곳곳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때 승강장 에스컬레이터 아래에 쓰러진 20대 청년을 봤다. 곁에 있던 친구는 사색이 됐다. 승강장에 사람들이 있었지만 겁이 났는지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이 씨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심정지 상태를 확인하고 곧바로 심폐소생술(CPR)을 시작했다. 두 손에 온 힘을 실어 환자의 가슴을 압박했다. 적어도 1분에 100회 이상 가슴을 눌러야 한다. 1초에 2회꼴이다. 3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300회가 넘는 CPR 끝에 청년의 호흡이 돌아왔다. 119 구급대가 청년을 병원으로 옮겼다. 이 씨의 신속한 조치가 없었으면 그 청년은 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에게 다른 ‘무용담’을 물었다. “처음이에요.” 예상치 못한 답이 나왔다. 알고 보니 이 씨가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구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도 처음 눈앞에서 본 상황이라 “덜덜 떨렸다”고 고백했다. 이날 그를 슈퍼 히어로로 변신시킨 건 바로 끊이지 않는 연습이었다. “1년에 4차례씩 교육을 받다 보니 몸에 배었나 봐요. 사람을 구하겠다는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더군요. 평소 훈련했던 대로 손을 가슴에 대고, 속도를 맞춰 눌렀더니 어느새 심장이 다시 뛰었습니다.”

경기 과천시 장애인복지관에는 여성 히어로가 있다. 간호사 이경희 씨(47)다. 그는 지난해 12월 복지관 식당에서 갑자기 쓰러진 60대 남성을 CPR로 살렸다. 이 씨가 직접 CPR로 사람을 구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상태가 심한 환자는 처음 봤어요. 일반인보다 익숙하긴 해도 응급실 간호사가 아니라면 직접 CPR를 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솔직히 조금 당황했습니다.”

사람 목숨을 구한 슈퍼 히어로는 두 사람뿐만이 아니다. 경기 중 발 빠른 조치로 동료의 목숨을 구한 축구선수, 하굣길에 쓰러진 여중생을 살린 환경미화원, 80대 승객의 숨을 되찾아준 버스 운전사 등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슈퍼 히어로가 있다.

이들의 사연을 접한 뒤 서울 동작구에 있는 서울시 보라매안전체험관을 찾았다. 1시간에 걸쳐 CPR 교육을 받았다. 슈퍼 히어로가 되는 건 보기보다 힘들었다. 단단한 갈비뼈를 4∼6cm 깊이로 누르려면 체력과 기술 그리고 집중력까지 필요하다. 하지만 불가능한 벽은 아니다. 꾸준한 연습만 있다면 남녀노소 누구나 CPR에 익숙해질 수 있다.

물론 1시간 교육으로 심정지 환자를 모두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 같은 초보 히어로가 2, 3명 모여 힘을 합치면 적어도 1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주위를 찾아보면 CPR 교육을 하는 곳이 여럿 있다. 마음만 먹으면 된다. 나도, 여러분도 그 옛날 슈퍼맨과 원더우먼처럼 진짜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다.
 
이성호 사회부 차장 starsky@donga.com
#경기 과천시 장애인복지관#간호사 김경희#초보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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